공생의 가면을 쓰고 희생을 강요하는 리더의 해부

정당한 희생인가

by 닥터브룩스

회의실의 정적 속에서 우리는 종종 기묘한 순간을 접한다. 팀원 간의 갈등이나 구조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부서장이 있다. 그는 "팀이라는 조직의 생존을 위해서" 누군가는 희생해야 한다고 말한다. 조직이 먼저 생존해야 팀원들도 생존할 수 있다는 논리로 언뜻 보기에 완벽해 보인다. 그것은 마치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오래된 지혜를 빌려온 숭고한 공동체 의식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왜 그 순간, 알 수 없는 불쾌감과 서늘함을 느끼는가. 왜 그가 말하는 '화합'이라는 단어가 마치 보이지 않는 흉기처럼 느껴지는가. 이 의문은 오늘 우리가 파헤쳐볼 이야기의 시작점이다. 흔히 인내를 미덕으로 여기며 살아왔지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과연 '공생'인지, 아니면 조직의 논리를 가장한 교묘한 '포식'인지 냉정하게 해부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먼저 이런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한 발짝 물러나 차가운 이론의 눈으로 상황을 바라봐야 한다. 생물학에서 공생은 서로 다른 생물이 함께 살며 이익을 주고받는 관계를 뜻한다. 그러나 희생을 강요하는 리더와 그것을 감내하는 팀원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것은 숙주가 영양분과 에너지를 빼앗기고 기생 생물만이 비대해지는 '기생(Parasitism)'에 가깝다. 조직 생태계에서 이는 '유독성 리더십(Toxic Leadership)'으로 나타난다. 이들에게 팀은 가꾸어야 할 유기체가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태워 없앨 땔감에 불과하다. 그들이 외치는 화합은 갈등을 해결하고 통합하는 과정에서 오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는 구성원을 제거함으로써 얻어지는 '가짜 평화'다. 여기서 심각한 철학적 문제를 직면하게 된다. 임마누엘 칸트는 정언명령을 통해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이 부서장에게 팀원은 철저히 '도구화'된 존재다. 개인은 공존의 파트너가 아니라 리더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소모품이며, 효율이 떨어지면 언제든 폐기될 수 있는 자원일 뿐이다. '조직을 위하여'라는 수사는 권력자의 편안함을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왜곡된 공리주의를 가리기 위한 기만적인 포장지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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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괴물 같은 리더십이 탄생하는 것일까. 그들이 태생적으로 악인이기 때문일까. 뇌과학과 심리학의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우리는 폭군 같은 그들의 모습 이면에 숨겨진 지질하고도 처연한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리더는 역설적이게도 깊은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조직학의 '피터의 법칙'이 말해주듯, 자신의 능력 이상의 지위까지 승진해 버린 무능한 리더는 언제 자신의 밑천이 드러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의 편도체에게, 문제를 지적하거나 갈등을 드러내는 유능한 팀원은 조력자가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으로 인식한다. 공포에 질린 뇌는 이성적인 문제 해결이라는 고차원적인 사고를 멈추고, 가장 원시적인 '투쟁 혹은 도피' 반응을 선택한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부품을 제거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쉽고 에너지 소모가 적은 생존 방식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권력의 역설'은 사람이 권력을 가질수록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뇌의 미러링 능력이 물리적으로 퇴화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그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신경학적으로 무감각해진 상태다. 그러므로 그들의 잔혹함은 계산된 악이라기보다는, 인지적 결함이자 본능적인 방어 기제에 가깝다. 그들은 강력한 군주가 아니라, 겁에 질려 떨고 있는 불안한 생존자에 불과하다.


역사는 이러한 메커니즘이 시대를 막론하고 반복되어 왔음을 증명하는 서늘한 증거들을 제시한다. 조선의 선조를 떠올려보자. 이순신 장군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을 때, 선조는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몽진을 떠난 자신의 무능함과 대비되는 이순신의 탁월함이 왕권을 위협한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의 '심리적 생존'을 위해 나라를 구한 영웅을 고문하고 백의종군시켰다. 명분은 '기강 확립'이었지만, 실상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조직(국가)의 유일한 희망을 꺾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공생인가. 아니, 이것은 나를 따뜻하게 하기 위해 집을 태우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현대 기업사에서도 엔론 사태의 경영진들이 보여준 'Rank and Yank(등급 매겨 내쫓기, 상대평가 기반의 강제 퇴출제)' 시스템이 이와 유사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기를 감추기 위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매년 하위 15%의 직원을 해고하며 침묵을 강요했다. 탁월함을 추구한다는 명분 아래 자행된 이 시스템은 결국 내부자들을 서로의 감시자로 만들었고, 거대한 파국을 초래했다. 16세기의 조정이나 21세기의 회의실이나, 무능한 리더가 생존을 위해 희생양을 찾고 그를 '조직의 암'으로 규정하여 축출하는 방식은 소름 끼치도록 동일하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리더들이 가장 무서운 점은 무능함 자체가 아니라, 현실을 왜곡하는 능력이다. 그들은 정당한 문제 제기를 "네가 참지 않아서 팀 분위기를 망치는 것"이라고 규정함으로써, 피해자가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든다.

"내가 문제인가? 내가 너무 예민한가?"

라는 자책은 리더가 쳐놓은 덫이다. 리더는 자신의 불안을 부하 직원에게 투사하고, 말로는

"우리는 한 배를 탔다"

고 하면서 행동으로는 언제든 버릴 수 있음을 암시하는 '이중 구속(Double Bind)' 상황을 만든다. 이는 구성원의 책임감을 역이용하여 꼼짝 못 하게 만드는 고도의 심리적 폭력이다.


그렇다면 이런 위험한 늪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만약 당신이 그런 리더 아래에 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기생은 그들의 생존 전략이며, 그들은 영양분을 공급하는 숙주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이전 글을 통해서 소개했던 '회색 돌(Grey Rock)'이 되어야 한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처럼, 그들이 원하는 감정적인 반응을 일절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죄책감을 자극하거나 분노를 유발하려 할 때, 무미건조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지시하신 내용 알겠습니다. 업무에 참고하겠습니다."

라고 반응하며 그들의 드라마 공급을 차단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치밀한 '기록의 방패'를 만들어야 한다. 현실이 왜곡되는 공간에서는 기록만이 유일한 진실이다. 모든 지시 사항, 갈등 해결을 거부한 정황을 텍스트로 남겨두어야 한다. 이것은 그들과 싸우기 위함이 아니라, 언젠가 다가올 희생양 찾기의 순간에 나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서적인 분리다. 그들의 비난은 당신의 무능함을 증명하는 신호가 아니라, 그들의 불안함이 만들어낸 소음일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우리가 도달해야 할 결론은 명확하다. 진정한 공생은 건강한 두 개체가 만났을 때만 가능하다. 한쪽이 다른 쪽을 갉아먹으며 유지되는 관계는 필연적으로 괴사를 부른다.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한다"

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의 생존 비용을 당신에게 청구하는 리더는, 당신에게 지금이 떠나야 할 때임을 알리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희생이 언젠가 인정받으리라는, 혹은 조직이 언젠가 진실을 알게 되리라는 헛된 희망에 머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 리더십을 용인하는 조직은 이미 병들어 있다.

"당신의 이탈은 도망이 아니라, 진정한 상호주의가 가능한 새로운 생태계로의 이주다."


기생충에게 승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에게 숙주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를 도구로 내어주지 않음으로써 그 사슬을 끊어내는 것, 그것만이 부품이 아닌 존엄한 목적으로서의 인간인 당신이 진짜 생존하는 길이다. 칸트의 말을 다시 한번 되새기자.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결코 단순히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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