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오랜 시간 동안 무언가를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구현할 것인가에 몰두해 왔다. 보고서를 더 빨리 쓰는 법, 코드를 더 정교하게 짜는 법, 데이터를 더 정확하게 분석하는 법 등 소위 ‘어떻게(How)’의 영역에서 탁월함을 증명하는 것이 생존의 법칙이자 능력의 척도였다. 하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하여 단 몇 초 만에 수십 장의 기획안을 쏟아내고 전문가 수준의 코드를 작성해 내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 거대한 축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낀다. 도구의 효율성을 두고 인간이 기계와 경쟁하는 것은 이제 무의미해졌다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기술적 방법론이나 효율성보다는 본질적인 목적과 가치를 찾는 것이 생존의 핵심이 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제 기술이 해결해 주는 ‘구현’의 문제를 넘어 ‘방향’의 문제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바야흐로 ‘어떻게(How)’의 시대가 저물고 ‘왜(Why)’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태도의 전환이 아닌 사고 체계의 근본적인 재설계를 요구해야 한다. 과거에는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드는 과정, 즉 구현의 장벽이 높았기에 그 벽을 넘는 기술자가 대우받았다. 하지만 이제 AI라는 강력한 도구가 그 장벽을 허물어버렸다. 누구나 페라리급 엔진을 소유하게 된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달리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달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능력이다. 이는 곧 과업의 수행자에서 사고의 설계자로 거듭나야 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는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다. 그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고 과정 자체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밀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것을 ‘사고의 해상도(Resolution of Thought)’를 높이는 과정이라 부른다. 과거에는 대략적인 지시만으로도 인간의 눈치와 경험이 빈틈을 메워주었지만, AI에게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논리적이고 구체적인 사고의 프로세스로 분해하여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모호한 직관을 명확한 알고리즘으로 변환하는 능력, 인간의 생각을 메타적으로 인지하고 구조화하는 능력이 새로운 시대의 코딩 능력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중요한 사고의 해상도는 어떻게 높일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이 독서를 그 해답으로 꼽지만, 단순히 책을 읽는 행위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AI는 이미 인류가 축적한 거의 모든 텍스트를 학습했다. 단순히 정보를 입력받는 차원이라면 인간은 결코 AI를 이길 수 없다. 진정한 차별점은 텍스트를 읽는 것을 넘어 그것을 이해하고, 해체하고, 자신의 맥락 안에서 재조립하는 ‘지식화(Knowledge-ization)’ 과정에서 발생한다. 책에 적힌 저자의 문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데이터를 다운로드하는 것에 불과하다. 사고의 해상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저자의 언어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번역하는 ‘재코딩’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예컨대 철학 책에서 읽은 칸트의 개념을 주식 시장의 변동성에 빗대어 설명해 보거나, 마케팅 전략을 생물학적 진화론의 관점에서 재해석해 보는 것이다. 저자의 용어가 아닌 자신이 속한 세계의 비유로 지식을 치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지식은 논리적 구조로서 자신의 머릿속에 안착한다. 또한 책을 스승이 아닌 토론 상대로 여기는 변증법적 태도 역시 필요하다. 저자의 주장에 끊임없이 반론을 제기하고, 그 이론이 작동하지 않는 예외 상황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투쟁의 과정 속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미세한 틈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치열한 지적 투쟁만이 사고를 흐릿한 저해상도에서 선명한 초고해상도로 끌어올려 줄 것이다.
이처럼 사고의 해상도가 높아지면 세상을 바라보는 기획의 관점 또한 혁신적으로 달라진다. ‘어떻게’의 시대에 기획이 “어떤 물건을 만들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면, ‘왜’의 시대에 기획은 “이것이 왜 필요한가”를 묻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단순히 소비자의 니즈(Needs)와 원츠(Wants)를 파악하는 것은 1차원적인 ‘왜’에 불과하다. “날씨가 더우니까 얼음이 필요하다”는 식의 인과관계는 AI도 충분히 데이터로 분석해 낼 수 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그러한 니즈와 원츠가 도대체 어디서 잉태되었는지를 추적하는 심층적인 접근이다. 마치 의사가 환자의 통증이라는 증상(Needs)만을 보고 진통제를 처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통증을 유발한 환자의 생활 습관, 직업적 스트레스, 사회적 환경이라는 근본적인 원인(Context)을 파헤치는 것과 같다. 기획자는 이제 단순한 제품 생산자를 넘어, 욕망의 기원을 탐구하는 ‘욕망의 고고학자’가 되어야 한다. 어떤 현상이 주어졌기 때문에 해결하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그 현상이 어떤 역사적, 사회적, 심리적 맥락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때 비로소 대체 불가능한 기획이 탄생한다.
이 지점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바로 ‘다학제적(Multidisciplinary) 접근’이다. 인간의 욕망이나 사회적 현상은 결코 단세포적이지 않다. 하나의 결과 뒤에는 심리적 결핍, 사회적 압력, 역사적 배경, 경제적 효용 등 수많은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따라서 하나의 학문 분과라는 단일 렌즈로만 세상을 보려 해서는 결코 ‘왜’의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 경제학의 렌즈로는 가격과 수요를 볼 수 있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인간의 비합리적 심리는 볼 수 없고, 공학의 렌즈로는 기능적 효율을 볼 수 있지만 그 기술이 야기할 문화적 충격은 예측하기 어렵다. 전설적인 투자자 찰리 멍거가 강조한 ‘격자틀 모형(Latticework of Mental Models)’처럼, 우리는 물리학, 생물학, 역사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핵심 아이디어를 머릿속에 엮어두고 이를 자유자재로 꺼내어 쓸 수 있어야 한다. 마치 GPS가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 최소 서너 개의 위성 신호를 받아 삼각측량을 하듯, 인문학, 과학, 예술이라는 서로 다른 위성에서 신호를 받아 종합할 때 비로소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고해상도의 통찰을 얻을 수 있다. AI가 수직적으로 깊은 지식을 가진 최고의 전문가라면, 인간은 그 수직적인 지식의 사일로(Silo)들을 가로로 엮어 새로운 맥락을 창조하는 통섭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AI 시대가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은
“당신은 얼마나 효율적인가?”가 아니라 “당신은 얼마나 깊이 있게 사고하는가?”이다.
‘어떻게’라는 엔진은 이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범용품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 엔진을 달고 어디로 향할지 결정하는 ‘운전대’를 잡는 일이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더 빨리 달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이 왜 중요한지를 설득해 내는 힘, 그것이 바로 인간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텍스트를 읽는 소비자가 아니라 텍스트와 투쟁하며 지식을 건축하는 생산자가 되어야 하고, 현상의 표면을 훑는 관찰자가 아니라 현상의 이면과 기원을 파헤치는 탐험가가 되어야 한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쪼개고 분석하여 자신만의 논리로 재구성하는 고통스러운 과정 없이는, 그저 AI가 뱉어내는 결과물에 감탄만 하다가 도태될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효율성의 시대가 가고 본질의 시대가 왔다는 것은 인간에게 오히려 축복일지 모른다. 기계적인 반복과 기능적인 수행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의미 부여’와 ‘가치 창출’의 영역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기획서의 줄 간격을 맞추고 엑셀 수식을 다듬는 시간에,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시대의 흐름을 읽는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야 한다. 경험과 지식을 파편화된 상태로 두지 말고, 끊임없이 연결하고 충돌시키며 고유한 인지적 서명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결코 복제할 수 없는 사람의 존재 이유이자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다시 노트북 앞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이걸 어떻게 할까?”라고 묻는 대신, “나는 왜 이것을 하려 하는가? 이 욕망의 뿌리는 어디에 닿아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책을 펼치고, 저자와 논쟁하며, 서로 다른 지식의 조각들을 맞춰나가는 그 지루하고도 치열한 시간이 나를 구원할 것이라 믿는다. 벽돌을 쌓는 사람이 아니라 성당을 짓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에, 오늘도 생각의 해상도를 높이기 위해, 더 깊은 ‘왜’를 찾기 위해, 기꺼이 생각의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어떻게’의 시대를 지나 ‘왜’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져야 할 유일하고도 가장 확실한 생존 전략이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