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연결되지 못한 관계
사무실의 공기는 언제나 건조하다. 그 삭막함 속에서 수많은 정보를 주고받고, 문서를 넘기며,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그러다 일 년에 한두 번, 서로의 성과와 태도를 활자로 남겨야 하는 '평가의 계절'이 오면, 그 건조한 공기는 예리한 칼날이 되어 모니터 위를 부유한다. 조직 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목격하거나 겪게 되는 장면이 있다. 누군가는 열정적으로 업무를 공유하고 자료를 넘겼으나, 돌아오는 것은 "설명이 불친절하다", "내용이 너무 어려워 이해하기 힘들다"는 차가운 피드백인 경우다. 심지어 업무를 공유한 당사자가 조직의 융화를 해치는 부정적인 존재로 낙인찍히기도 한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는 소통 능력이 부족한 발화자의 과실처럼 보인다. 잘 차려진 밥상도 떠먹여 주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식의 불만이 정당한 요구처럼 포장되곤 한다.
하지만 이 익숙한 비난의 서사에서 한 발짝 물러나, 그 이면에 숨겨진 본질적인 풍경을 복기해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변수는 '설명의 난이도'가 아니다. 바로 업무가 공유되던 그 순간, 듣는 이가 유지했던 '침묵'이다. 그 침묵의 본질은 '질문'에 있다.
소통의 실패는 흔히 말하는 자의 탓으로 귀결되곤 한다. 설명이 어렵다거나,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식이다. 그러나 진정한 소통의 완성은 발화자의 입이 아니라, 수신자의 능동적인 반응, 즉 그 '질문'에서 이루어진다. 철학적 관점, 특히 인식론의 영역에서 볼 때 타인의 설명 앞에서 유지하는 침묵은 단순한 정적이 아니다. 그것은 "나는 당신이 전달하는 정보를 이해할 수 있는 지적 배경을 갖추고 있으며, 추가적인 부연 설명 없이도 이 맥락을 소화할 수 있다"는 무언의 선언이자 사회적 계약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만히 있었으면서, 시간이 흐른 뒤 어떤 순간에 이르러 그 불성실한 태도를 평가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는 단순한 업무 태만이나 능력 부족의 문제를 넘어선다. 그것은 자신이 맺은 암묵적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그 귀책사유를 상대방에게 전가하는 '지적 불성실(Intellectual Dishonesty)'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침묵으로 동의를 표해놓고, 나중에 무지를 무기로 상대를 공격하는 행위는 비겁한 행위이지 않을까.
이러한 현상을 사회과학적 시선으로 들여다보면, 조직 내 만연한 '무임승차(Free Rider)' 심리를 발견하게 된다. 조직에서 새로운 지식이나 업무를 넘겨받는다는 것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학습하고 체화해야 하는 '비용'을 수반한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 비용을 지불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동료가 잘 씹어서 소화되기 쉬운 형태로 떠먹여 주기만을 바란다. 이는 직장이라는 프로들의 전장에서 발현되는 유아적인 퇴행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의 게으름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어 기제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무능함이 드러날까 두려워, 그들은 선제적으로 정보를 제공한 사람을 공격한다. "저 사람은 소통이 안 돼", "너무 부정적이고 자기만 알아"라는 프레임은 자신의 무지를 상대방의 소통 부재로 위장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알리바이가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질문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뒤늦게 비난할까? 하는 궁금증이 들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를 이해하기 위해 뇌과학과 심리학의 렌즈를 빌려보도록 하자. 인간의 뇌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지적 능력이 위협받는 상황을 생존의 위기로 인식한다. 난해한 업무 자료를 마주한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들키는 것은 뇌에게 공포다. 이성적 사고를 담당하는 전두엽이 "지금 질문해서 알아내자"라고 판단하기도 전에, 공포를 관장하는 편도체가 "지금 모른다고 하면 바보 취급을 받을 거야"라고 경고를 보낸다. 그 결과가 바로 '회피', 즉 침묵이다. 질문하지 않음으로써 그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은 업무는 사라지지 않고 지속적인 인지 부하(Cognitive Load)를 일으키며 스트레스를 준다. 이 불편한 인지 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해 뇌는 가장 손쉬운 탈출구를 찾는다. 바로 '남 탓'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투사(Projection)'가 일어나는 것이다. 내 안의 불안과 무능을 해소하기 위해 그 원인을 외부의 대상에게 돌려버리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설명이 엉망인 거야"라고 믿는 순간, 자아는 상처받지 않고 보호된다. 나아가 동료들과 삼삼오오 모여 상대를 '불통의 아이콘'으로 만들며 험담을 나눌 때, 뇌는 도파민을 분비하며 안도감을 느낀다. 결국, 뒤늦은 비난은 정당한 피드백이 아니라,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신경학적 자기 위안에 가깝다.
이것은 비단 특정 개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복잡성이 증대되는 현대 조직 사회가 앓고 있는 '전문성의 역설'이다. 정보의 양은 방대해지고 배워야 할 것은 넘쳐난다. 이 과정에서 고통을 감내하며 질문하고 배우려는 자와, 그 과정을 생략하고 쉬운 결과물만을 요구하는 자 사이의 간극은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목소리가 큰 쪽은 종종 후자인 경우가 많다. 소위,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것처럼. 목소리 큰 사람이 일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같은 이치이지 않을까.
억울한 누군가를 변호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회의 시간의 침묵을 '이해'로 위장한 적이 없는가? 동료의 전문적인 조언을 자신의 무지를 찌르는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방어적으로 행동한 적은 없는가? 진정한 프로페셔널리즘은 완벽하게 차려진 밥상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그 밥상이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지 묻고, 이해가 안 되면 젓가락을 멈추고 다시 물어보는 용기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결국, 업무 공유의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의 책임 소재를 묻는다면 답은 명확해진다. 설명이 부족했다고 불평하기 전에 질문하지 않았던 그 침묵, 그것이 바로 '원죄'다. 정보를 제공한 이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타인의 침묵을 너무 순진하게 '이해'라고 믿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방어 기제가 얼마나 교묘하게 작동하는지를 간과했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의 일터가 오해와 투사로 얼룩지지 않기 위해서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용기를 내지 않은 자가 나중에 내뱉는 비난은, 그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소음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침묵은 금이 아니다. 때로는 비겁함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그 비겁함이 타인의 성실함을 해치려 할 때, 우리는 단호하게 그 침묵의 껍질을 깨고 진실을 물어야 한다.
"그때 왜 질문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일터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존엄이자 정직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