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의 시대

모두가 기획자, 모두가 개발자

by 닥터브룩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며칠 밤을 새워가며 작성해야 했던 기획서가, 코드가 인공지능에게 몇 마디 건네는 것만으로 단 수초 만에 완성되는 그런 시대가 도래했다. 그런 시대의 순간을 생생하게 바라보며 "일이 많이 줄겠구나"라고 생각한 반면, 어쩌면 일자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로 다가온다. 또한 (모순적 이게도) 머리 아프게 고민해야 하는 것으로부터의 해방감, 그러나 그 뒤를 이어 찾아온 본질적인 질문이 생긴다. 기획, 개발이라는 행위 자체가 가지고 있던 육중한 무게감이 증발해 버린 이 시점에, 과연 인간이 쥐고 있어야 할 최후의 가치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표가 떠오른다. 나는 이것이 단순한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업의 본질이 재편되는 거대한 변곡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다시 기획의 시대'가 도래하는 역사적인 변곡점에서 "인간이 했던 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과거의 기획이 개발자에게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설명하기 위한 '문서 작성'의 영역이었다면, 지금의 기획은 그 자체로 제품을 태동시키는 '창조'의 영역으로 격상되었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명확하다. 개발에 투입되는 물리적, 정신적 에너지가 '0'에 수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소프트웨어 산업에서 가장 비싸고 희소한 자원은 '구현 능력(How-to)'이었다. 아이디어가 아무리 좋아도 그것을 실제 코드로 옮기는 데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들었기에, 개발자는 귀한 대접을 받았고 기획자는 그들의 언어를 배우려 애썼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역전되었다. '어떻게 만들 것인가'는 더 이상 병목이 아니다. AI라는 무한한 자원이 그 문제를 해결해 주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그리고 더욱 중요해진 것은 오직 '무엇을 만들 것인가(What)', 그리고 '왜 만들어야 하는가(Why)'에 대한 치열한 정의뿐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앞으로의 시대를 이끌어갈 가장 강력한 주체로 '개발자 출신 기획자', 혹은 더 나아가 '프로덕트 엔지니어(Product Engineer)'를 주목한다. 혹자는 개발 장벽이 낮아졌으니 기획자가 개발을 배워서 직접 만드는 것이 대세가 되지 않겠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도 유효한 전략이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개발의 생리를 뼛속 깊이 이해하고 있는 기획자가 훨씬 더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이유는 그들이 가진 고유한 감각, 바로 '실현 가능성(Feasibility)에 대한 직관' 때문이다. 순수 기획자는 종종 이상적인 사용자 경험을 그리느라 그 이면에 숨겨진 기술적 비용을 간과하곤 한다. 반면 개발자 출신 기획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바로 그 순간, 머릿속에서 데이터베이스의 구조가 설계되고 API의 호출 비용이 계산된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의 차이가 아니다. 본능의 영역이다. 그들은 화려하지만 불필요한 기능을 걷어내고, 기술적으로 가장 간결하면서도 사용자에게 핵심 가치를 전달할 수 있는 '최적의 경로'를 즉각적으로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들은 개발자들의 고질적인 함정인 '오버 엔지니어링(Over-Engineering)'으로부터 자유롭다. 기술 자체에 매몰되어 불필요하게 복잡한 아키텍처를 쌓아 올리는 것이 얼마나 큰 유지보수의 부채가 되는지, 그들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알고 있다. 개발의 관점을 장착한 기획자는 코드를 예술 작품이 아닌, 철저한 '비용'이자 '도구'로 바라본다. 그렇기에 그들은 가장 단순한 코드로 가장 확실한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이는 리소스가 제한된 환경에서 생존해야 하는 1인 기업이나 스타트업에게 있어 무엇보다 강력한 무기다. 또한, 기획 의도가 개발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정보의 손실, 즉 '번역 비용'이 제로(Zero)라는 점 또한 이들의 독보적인 강점이다. 머릿속의 기획이 곧바로 코드로 직역되는 경험, 이것은 분업화된 조직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쾌속의 질주와도 같다.


이러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기업'이라는 개념의 재정의를 요구한다. 바야흐로 '진정한 1인 기업'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1인 기업은 자신의 시간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프리랜서나 자영업자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AI 시대의 1인 기업가는 확장 가능한 시스템을 소유한 '자본가'에 가깝다. 과거에는 매출을 10배 늘리기 위해 직원을 10배 더 채용해야 했다. 매출과 인건비가 비례하여 증가하는 선형적인 구조였다. 하지만 소프트웨어의 복제 비용이 0원이고, AI 에이전트가 노동을 대신하는 지금은 이 공식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한 명의 개인이 수십만, 수백만 명의 사용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이제 1인 기업가의 조직도는 완전히 새로 그려진다. CEO이자 CPO, CTO인 '나'를 정점으로, 코딩과 리팩토링을 담당하는 주니어 개발자로서의 AI, 디자인을 시각화하는 생성형 AI, 그리고 고객 응대를 담당하는 챗봇이 하위 조직을 구성한다. 여기서 인간인 '나'의 역할은 실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거대한 디지털 군단을 지휘하는 '오케스트레이터(Orchestrator)'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다음 단계, '오케스트레이션(Orchestration)'의 시대다. 과거의 개발자가 문법(Syntax)을 틀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면, 오케스트레이터는 의미(Semantics)와 맥락(Context)을 설계하는 데 집중한다. RAG(검색 증강 생성)를 통해 필요한 정보를 긁어오고, LLM(거대 언어 모델)에게 판단의 기준을 제시하며, API를 통해 세상에 결과를 내보내는 이 일련의 흐름을 설계하는 것. 이것은 코딩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건축이나 작곡에 가깝다. 에이전트 A의 결과물이 에이전트 B의 입력으로 들어갈 때 발생할 수 있는 오류를 예측하고, 전체 시스템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돌아가도록 맥락을 통제하는 능력, 이것이 바로 새로운 시대의 핵심 역량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오케스트레이션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는 감히 그 종착지를 '통섭(Consilience)'이라고 부르고 싶다. 단순히 기술을 잘 다루거나 기획을 잘하는 단계를 넘어, 기술과 인문, 비즈니스와 예술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지점 말이다. AI가 노동을 대체해 줄수록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가장 인간적인 역량이다. 기술은 '어떻게(How)'를 해결해 줄 수 있지만, '왜(Why)'에 대해서는 답하지 못한다. 그 '왜'를 정의하는 것은 오직 욕망과 결핍을 가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아직까지 유효하다고 보는 것은 인간의 질문 능력일 것이다. 연관되지 않은 것들을 연결 지을 수 있는 능력, 그것이 바로 통섭적인 사고체계가 아닐까.


우리가 지향해야 할 프로덕트 엔지니어의 모습은 단순히 코드를 짜는 기술자가 아니다. 그는 제품의 기술적 구조(Architecture) 안에 사용자를 향한 철학(Philosophy)을 담아내는 사람이어야 한다. 버튼의 위치 하나, 알림 메시지의 문구 하나에도 인간의 심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배려가 스며들어야 한다. 기술적 이성(Engineering)과 인문학적 감성(Humanities)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융합된 상태, 즉 통섭의 단계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AI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그 파도 위에 올라탈 수 있다. (스티브 잡스가 강조했던 것처럼)

과거 르네상스 시대의 인재들이 예술과 과학을 넘나드는 '폴리매스(Polymath)'였던 것처럼, AI 시대의 우리는 다시금 '보편적 인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분업화라는 명목하에 쪼개어졌던 기획, 디자인, 개발, 마케팅이라는 직무의 장벽은 이제 무의미하다. AI라는 강력한 레버리지를 손에 쥔 개인은, 그 모든 것을 통합하여 하나의 온전한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 아니, 만들어내야만 한다.


지금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는가? 그것을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위해 문서를 작성하는 대신, 당장 AI라는 파트너와 함께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보라. 실패를 두려워해서도 아니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개발에 들어가는 에너지는 0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만들고자 하는 것이 세상에 어떤 가치를 던질 수 있는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뿐이다.


기획의 시대는 다시 왔다고 자부하고 싶다. 하지만 그 기획은 책상 위에서의 공상이 아니라, 시스템을 통해 세상에 즉각적으로 실현되는 실천적 기획이다. 이제 우리는 모두가 기획자이자 개발자이며, 동시에 철학자가 되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이 거대한 기술의 격변기 속에서, 소외되지 않고 주인이 되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무례함은 상황을 가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