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 군집본능

군중심리

by 닥터브룩스
IMG_9798.HEIC 벤저민 그레이엄의 현명한 투자자 중에서


도심의 교차로의 건널목에서 보행자 신호등이 아직 붉은색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참지 못하고 발걸음을 내디딜 때 벌어지는 광경을 가끔 보게 된다. 처음에는 한 사람의 작은 위반에 불과하지만, 그의 등 뒤로 두세 명의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발을 떼기 시작하고, 이내 꽤 많은 무리가 신호를 무시한 채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마법 같은 불법적인 순간 말이다. 이 짧은 찰나에 인간의 이성, 법규, 그리고 독립적인 판단력은 잠시 작동을 멈추고,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자력에 이끌리듯 타인의 행동에 동기화된다.


이런 일상의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다 보면 내면 깊은 곳에서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왜 우리의 몸은 뇌가 상황을 논리적으로 인지하고 판단하기도 전에 군중의 움직임에 먼저 반응하는 것일까."

"주변의 모든 이들이 한 방향으로 움직일 때, 홀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은 왜 그토록 견디기 힘든 심리적 압박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데도 왜 그런 행동을 서슴없이 하게 되는 것일까."


이러한 일상의 의문은 관련성이 없을 것 같은 벤저민 그레이엄의 저서 '현명한 투자자'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이는 그의 저서 9장 서두에 실린 글로써, 선생님이 12마리의 양 중 한 마리가 담장을 뛰어넘으면 몇 마리가 남겠느냐고 물었을 때, 11마리라는 산술적이고 논리적인 정답 대신 "한 마리도 남지 않는다"라고 답한 소년의 평범한 대답 말이다. 선생님은 소년이 기본적인 뺄셈조차 모른다고 혀를 찼지만, 소년은 뺄셈의 규칙보다 살아 숨 쉬는 생명체의 본질을 훨씬 더 깊이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양들은 독립적으로 사고하여 행동하기보다는, 가장 먼저 움직인 개체를 무작정 따라가는 강력한 '군집 본능(Herd Instinct)'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 말이다. 한 마리가 담장을 넘으면 나머지 11마리는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왜 넘어야 하는지 묻지 않고 맹목적으로 그 궤적을 쫓는다.


이 우스갯소리를 들으며 양들의 단순함을 비웃지만, 횡단보도에서의 작은 일탈이나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비추어보면 인간 역시 이 담장 앞의 양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누군가 먼저 보이지 않는 담장을 넘으면, 우리 역시 이성과 논리라는 거추장스러운 허물을 벗어던지고 기꺼이 그 무리의 꽁무니를 쫓아 뛰기 시작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왜 이토록 무리에 동화되려는 강력한 관성에 이끌리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대 사회의 복잡한 시스템을 벗어나 수십만 년 전 인류의 진화적 역사가 쓰이던 아득한 과거로 시선을 돌려야만 한다. 깎아지른 절벽과 맹수들이 들끓던 가혹한 자연환경 속에서, 개체의 물리적 힘만으로 생존을 담보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시기, 무리에서 이탈하여 홀로 남겨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가장 확실한 사형 선고였다. 수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혼자 남아 그 원인을 분석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려던 독립적인 개체들은 포식자의 먹잇감이 되어 유전자를 남기지 못했다. 반면, 무리가 이유 없이 뛰기 시작할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덩달아 도망쳤던 겁 많고 의존적인 개체들만이 살아남아 우리의 조상이 되었다.


진화 심리학은 이러한 현상을 생존을 위한 가장 정교하고 실용적인 메커니즘으로 설명한다. 군중 속에 섞이는 것은 예측 불가능한 세상의 위험을 분산시키는 가장 강력한 '사회적 안전망'이었다. 현대의 신경과학 연구들은 우리가 무리에서 소외되거나 따돌림을 당할 때 느끼는 심리적 고통이, 육체가 칼에 베였을 때 느끼는 물리적 통증과 뇌의 동일한 영역을 활성화시킨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다. 우리의 뇌는 남들과 다른 길을 가는 것을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위기로 받아들이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수가 선택하는 길을 따르는 것은 현대인의 지적 게으름이나 나약함의 발로가 아니라, 인지적 에너지를 극도로 절약하면서 생존 확률을 극대화해 온 가장 오래되고 성공적인 전략의 산물일 것이다.


그러나 진화의 과정에서 빚어진 이 훌륭한 생존 소프트웨어가, 포식자가 사라진 고도화된 현대 사회의 하드웨어와 만날 때 우리는 심각하고 파괴적인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무리 속에서 느끼는 안전함은 때때로 환상에 불과하며, 다수가 선택했으니 당연히 옳을 것이라는 맹신은 집단적 비합리성의 늪으로 밀어 넣는다. 1950년대 솔로몬 애쉬(Solomon Asch)가 진행한 유명한 동조 실험은 이러한 군중심리의 맹점을 소름 끼치도록 정확하게 보여준다. 명백하게 길이가 다른 선분들을 보여주고 짝을 찾는 단순한 시각 테스트에서, 주변의 실험 도우미들이 의도적으로 오답을 말하자 수많은 진짜 참가자들은 자신의 두 눈이 보고 있는 객관적 진실을 부정하고 다수의 틀린 대답에 동조했다. 그들은 진실을 외치며 혼자 고립되는 불안감 대신, 거짓에 동참하여 무리 속에 숨는 심리적 안전감을 선택한 것이다. 무리가 벼랑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서로의 뒷모습만 보고 맹종하는 군집 본능은 집단 자살이라는 끔찍한 비극으로 이어진다.


17세기 네덜란드를 휩쓸었던 튤립 파동의 예를 들어 본다면, 평소라면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행동했을 시민들이, 그저 남들이 다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평범한 구근 식물 하나에 평생 모은 재산을 쏟아부었다. 모두가 같은 방향을 바라볼 때, 누군가 방향의 옳고 그름을 묻지 않는다면, 가장 안전해 보이던 그 길은 순식간에 파멸로 향하는 가장 위험한 급행열차가 되고 말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인류 문명의 발전을 관통하는 거대한 딜레마를 만나게 된다. 인간의 가장 강력한 본능이 무리 속으로 숨어드는 것이고, 안전을 추구하는 것이 생물학적 숙명이라면, 도대체 인류는 어떻게 동굴을 벗어나 도시를 건설하고 달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었단 말인가. 바로 여기서 기존의 질서를 거스르고 무리의 맨 앞으로 걸어 나가는 개척자, 이단아, 그리고 혁신가의 절대적인 필요성이 대두된다. 인류의 역사는 무리 전체가 발맞춰 전진해 온 평탄한 행진이 아니라, 따뜻하고 안전한 무리의 품을 자발적으로 벗어나 뼛속까지 시린 미지의 칼바람을 정면으로 맞았던 소수의 '아웃라이어'들이 만들어낸 처절한 도약의 기록이다.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관찰한 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떠올려 보자. 그는 당시 모든 사람이 진리라고 믿었던 거대한 지적 무리에서 스스로 이탈한 최초의 펭귄이었다. 무리는 안정을 위협하는 그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고립시켰지만, 그가 개인적인 파멸의 위험을 무릅쓰고 던진 진실의 돌멩이는 결국 인류 세계관 전체의 물길을 바꾸어 놓았다. 또한 19세기 의사 이그나츠 제멜바이스(Ignaz Semmelweis)는 어떠한가. 그는 산모들의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의사들이 수술 전 손을 씻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주류 의학계의 거센 조롱과 핍박 속에 정신병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그는 무리에게 짓밟혔지만, 그의 주장은 훗날 현대 의학의 가장 기본적인 감염 예방 수칙이 되었다. 발전이란 이처럼 누군가 처음으로 낯선 담장을 넘는 상처투성이의 과정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무리 전체의 새로운 안전지대로 확장되는 법이다.


무리와 개척자의 관계는 단순한 선과 악, 혹은 정체와 발전의 대립항이 아니라 종의 생존과 진화를 완성하는 필수 불가결한 상호보완적 메커니즘이다. 무리는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어 종을 보존하는 강력한 지지 기반을 제공하지만,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고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법칙에 순응하지 않는 돌연변이의 마찰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개척자들만 존재하는 사회는 무모한 위험 감수로 인해 자멸할 것이며, 반대로 양 떼처럼 순응하는 이들만 존재하는 사회는 외부의 작은 충격에도 무너져 내리는 정체의 늪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인류의 진정한 진보는 이 둘 사이의 역동적인 순환 속에서 피어난다. 한 명의 혁신가가 미지의 영역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굴해 내면, 그 뒤를 따르는 소수의 '용기 있는 첫 추종자'들이 그 위험을 분산시키고 가치를 증명해 낸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낯선 길이 충분히 다져졌을 때, 거대한 무리가 그곳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안정을 구축한다. 누군가 비난과 소외의 두려움을 뚫고 무리의 맨 앞줄에 서지 않는다면, 거대한 군중은 제한된 자원이 모두 고갈될 때까지 좁은 울타리 안에서 무의미한 원을 그리며 맴돌 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리더십이란 단순히 무리를 잘 통솔하고 관리하는 기술이 아니라, 현재는 몹시 불안하고 위험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두를 구원할 새로운 방향을 짚어내는 외롭고 계산된 용기 그 자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타인의 발걸음에 무의식적으로 동기화되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금 성찰해 보며, 무리의 안전과 개척자의 위험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이 딜레마가 비단 역사책 속 위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깊이 깨닫게 된다. 그것은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직면하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마다 조용히 치러지는 내면의 전투다. 끊임없이 사회적 기대, 유행, 그리고 타인의 시선에 이끌린다. 타인의 행동에 기대어 자신의 결정을 위임하는 '동조의 관성 법칙'을 뼈저리게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첫 번째 관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매 순간 갈릴레오나 제멜바이스처럼 비장한 투사가 될 필요는 없다. 일상의 소소한 영역에서는 인류가 오랜 시간 축적해 온 무리의 지혜에 기대어 에너지를 아끼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하고 실용적인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본질적인 가치, 업의 방향, 그리고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 결정적인 교차로 앞에서는 반드시 멈춰 서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지금 진정으로 원해서 이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내 앞의 누군가가 움직였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따라 걷고 있는 것인가."


자신만의 가치를 찾기 위한 여정에서 남들 틈에 섞여 군중 속에 파묻히는 것은 결코 제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저 상처받지 않고 '죽지 않기 위해' 버티는 수동적인 방어기제일 뿐이다. 물론 그 방어기제도 너무 중요하다. 그러나, 모두가 변화를 위한 담장 앞에서 망설일 때, 그 담장을 넘을 것인지, 말 것인지, 혹은 모두가 그 담장을 넘을 때, 불안감을 억누르며 홀로 가만히 서 있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한 번쯤은 깊은 고민을 해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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