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보령 + 한미 수필 문학상 응모작
이곳은 간이식 수술이 한참 진행되고 있는 수술실 안이다.
수술대 위의 환자는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고, 출혈을 간신히 틀어 막고 있는 위장관 압박튜브는 무게추로 팽팽히 당겨져 있어 환자의 고개는 뒤로 완전히 젖혀져 있었다. 환자의 양쪽 목에는 커다란 중심 정맥관이 위치해 있는데, 심각한 간질환으로 인해 혈액 응고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환자의 양쪽 중심정맥관 주위로 서서히 스며 나오던 피가 수술대에서 한방울씩 떨어져서 바닥에 깔아놓은 모포를 흥건히 적시고 찰랑거리고 있었다.
출혈양에 맞춰가기 위해 급속 수혈기는 쉼없이 계속 환자에게 피를 수혈중이었다.
중세 유럽 시대의 지하 고문실로 착각할 정도로 기괴한 장면이 지금 간이식이 진행되고 있는 이곳 수술실에서 연출되고 있었다. 계속되던 수혈이 잠깐 주춤하던 찰나에 잠시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 지리라 상상도 못했는데, 나는 어쩌다가 지금 이 순간에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
그날 아침 이식 외과 교수님에게서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간이식에 적절한 사체 공여자의 장기를 찾았는데, 간이식을 받아야 할 환자의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아 그날 이식 마취 담당이었던 내 의견을 들어보고자 급히 연락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귀 기울여 자세히 들어보니 간이식이라는 매우 큰 수술을 견뎌 내기에는 현재 상태가 너무 안좋아 보이는 환자였다.
내시경적인 지혈로도 조절 안되는 위 정맥류 출혈을 압박용 튜브로 간신히 틀어막고, 혈압을 유지하기 위해서 총 5가지 승압제가 들어가고 있는, 백척간두에 서있는 듯한 모습의 환자였다.
이식외과 교수님에게 내 의견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환자 상태가 너무 위중해서, 일단 백업 (Back-up) 환자를 빨리 불러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의 이식 대상환자가 적합하지 않을 경우, 그 다음 순위로 장기를 이식받을 환자를 백업 환자라고 한다)
다만, 전화상으로만 들은 정보만으로는 판단하기 부족하니, 내가 직접 환자를 보고 최종 의견을 결정해서 알려주겠다고 했다.
사체 간이식 수술을 받은 환자가 사망할 경우 단순히 하나의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장기가 상태가 더 나은 환자에게 갔다면 살릴 수 있었던 기회도 같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매우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환자를 직접 보기 위해 찾아간 중환자실에서는 해당 환자의 입원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환자의 위장관 출혈을 막기 위해 소화기 내과 의사들이 악전고투를 벌였던 흡사 전쟁터와도 같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환자는 인공호흡기와 지혈용 압박튜브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고, 환자의 남편이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환자의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았던 지라, 환자의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을 걸어보았다.
환자의 남편은 내가 마취과에서 왔다고 했더니, 간이식 수술을 위한 장기가 드디어 구해져서 너무 다행이라고 하면서 잔뜩 기대감에 차 있는 표정으로 매우 기뻐하고 있었다.
위중한 환자의 상태에 낙담하고 있으리라는 나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환자가 드디어 살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 차서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왠지 모르게 기시감이 들었다.
그런 낙관적인 환자의 남편의 영향이 있었을까… 직접 본 환자는 전화상으로만 듣던 것보다는 상황이 많이 나아진 것으로 보였다. 그동안 중환자실 의료진이 열심히 환자를 소생시킨 덕분에 혈압을 올려주는 승압제는 두가지로 줄어있었고, 혈압 유지를 위해 필요한 수혈양도 그나마 줄어들어 있던 상황이었다.
이식외과 교수님께 전화를 걸어서 일반적인 간이식 환자보다는 상태가 안 좋은 듯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위험성을 감수하고 진행시켜 볼만하다는 나의 마취과 소견을 말씀드렸다.
분명히 처음에 이 환자에게 간이식 수술은 너무 위험하다는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던 내가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는 아마도 환자와 남편을 보면서 19년전 나와 아버지의 상황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19년전 당시에 공중 보건 의사였던 나는 아버지가 식도정맥류 출혈로 응급실에 실려 가셨다는 다급한 전화를 받고 달려갔다. 외래 진료로 잘 조절되던 아버지의 만성 간질환이 갑작스러운 식도 정맥류 출혈로 악화되었고, 3주라는 짧은 시간에 3번이나 다량의 출혈이 생길 정도로 상황이 급박했다. 당시 나는 전문의가 아닌 일반 공보의였지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서 신속하면서도 냉철한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孝’라는 막연하면서도 구태의연한 개념보다는 현실적인 접근법을 빠르게 선택해서 실행에 옮겨야 했다. 당시 CTP 점수가 낮아서 사체 간이식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재출혈의 위험이 높은 상황의 아버지에게는 혈액형이 같으면서 신체 사이즈가 비슷한 나의 생체 간기증이 가장 빠른 해법이었다. 나로서는 몇 년간의 정신적인 준비가 이미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더 이상 생체 간이식 수술을 미루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생체 간이식 수술을 결정하고 귀가한 날은, 당시 급박하게 돌아가던 상황 중에도 처음으로 두발을 쭉 뻗고 숙면을 취할 수 있었던 날이었다. 나는 그 당시에 아무런 이유없이 아버지의 완전한 회복을 자신하고 있었고, 사망률이 1%에 육박했던 생체 간이식 공여자 수술에 대해서도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렇게 결정된 생체 간이식 수술은 무사히 시행되었고, 아버지는 무난하게 회복하셔서 건강을 완전히 되찾을 수 있었다.
그 이후 나는 마취과 수련의의 길을 걷게 되었고,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환자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중환자의학과 이식마취의 세부전공을 택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고위험군 간이식 마취와 중환자 관리를 해오고 있어서, 과거 생체 간이식 공여자로서의 값진 경험이 나의 인생 경로를 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눈앞의 이 환자는 간이식 수술을 받지 못할 경우 매우 높은 확률로 사망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 환자를 보면서 19년 전 무력한 상황에 놓인 응급실의 아버지가 떠올랐고, 이 환자의 남편을 보면서 맹목적으로 낙관적이었던 그때의 나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수술을 진행시켜야만 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때는 간 공여자로서, 이번에는 마취과 전문의로서 역할이 바뀌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진행시킨 간이식 수술은 내 예상대로 지혈이 잘되지 않고 수혈양도 많이 필요해서 앞서 말한 기괴한 장면이 연출되기는 했지만, 그 외의 수술 과정에서는 커다란 어려움 없이 간이식 수술을 마칠 수 있었다. 그후 며칠동안 서서히 회복하는 환자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위장관 출혈을 틀어막는 압박튜브로 지혈시키고 있는 와중에 간이식수술을 진행했던 경우는, 수많은 논문 데이터 베이스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찾아볼 수가 없는 매우 드문 경우였다. 따라서 해당 환자에 대한 공식적 증례 보고서를 작성하면, 비슷한 상황에 놓인 환자를 치료하는 의료진에게 일말의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방문한 환자의 입원실에서는 아예 몰라볼 정도로 거의 완전하게 회복한 환자와 남편이 웃으면서 나를 맞이했다. 두 분은 흔쾌히 증례보고서 작성에 동의하였고 서명을 마치면서 비슷한 상황의 다른 환자들에게도 꼭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우리 병원에서 퇴원했다.
우리는 일상의 하루하루를 매우 바쁘게 살아가느라, 처음 우리가 지금 걷는 길에 들어서게 된 ‘초심’을 잊고 살 때가 많다. 나는 매우 감사하게도 지금의 이 길에 들어서게 된 그 순간을 이 환자를 통해 다시 경험해볼 수 있었고, 그때의 초심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러한 초심을 최대한 오랫동안 고이 간직하고 항상 정진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소명을 착실히 이루어 나아갈 수 있기를 나는 간절히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