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지나갈 무렵부터 소심한 눈팅족에서 벗어나 댓글을 달고, 글도 어쩌다 하나씩 쓰게 됐다.
봄에 드라마를 끝내고 잠깐의 휴식기에 접어들었던 배우가 연극 무대에 선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십 대에 데뷔한 이래 처음으로 하게 된 연극이었기에 세간의 관심이 컸다.
더블 캐스팅으로 극은 진행되었다.
예매 날짜에 맞춰 대기를 타고 있다가 들어갔는데 순식간에 가까운 좌석은 매진되었다.
가까스로 먼 좌석을 티켓팅할 수 있었다.
덕후들의 손가락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카페에 양도글이 올라왔다.
내 좌석보다는 훨씬 앞 좌석이었다.
쪽지로 서로의 번호를 교환하고 예약된 티켓번호를 받았다.
여러 좌석을 일단 확보해 놓고 나서 비교한 후 내놓는 사람들도 꽤 있었고, 일정이 변경되어 취소를 해야 하나 그래도 덕후에게 넘기는 게 서로 좋으니 양도를 하겠단 글도 꽤 있었다.
티켓을 두 장 구하고 나니 너무 기대가 되었다.
연예인을 실제로 만났던 경험은 꽤 있었다.
우연히 식당이나 공항에서 만난 적도 있었고, 영화제에 참석했다가 본 경우도 많았다.
난 연예인에게 딱히 관심이 있는 편이 아니라서 마주쳐도 그냥 '누구구나'하는 정도로 생각했지 크게 반응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근데 내가 처음으로 마음을 뺏긴 사람이라 그런지 실제로 연기하는 모습을 코 앞에서 본다고 생각하니 엄청 설렜다.
친구와 동행을 했다.
혼자 공연도 보러 다니고 하는 나였지만 왠지 혼자 가기가 쑥스러웠다.
극장에 앉아 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 극장에 온통 랜선으로 짖고 까불고 했던 덕후들이 가득할 거라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주위를 봐도 다들 멀쩡하게 생긴 평범한 사람들뿐이라서 도저히 덕후가 누군지 가늠이 안되었다.
암전이 되었다가 불이 들어왔을 때, 의자에 앉아 있는 배우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내 좌석이 그만큼 가까운 센터였던 것이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든 생각은 '저 사람은 천상 배우구나'하는 생각이었다.
화면으로 보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우라가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어리고 순하게만 보였는데 무대에서 조명을 받고 있는 모습에선 조금 까칠하고 냉랭한 느낌이 있었다.
첫 느낌은 그랬다.
배우가 연기를 시작하고 나는 전에 없이 긴장된 상태로 몰입이 되어 갔다.
처음으로 하는 무대 위의 연기라 아무래도 어색한 면이 있었다.
발성 부분에서도 많이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대중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무엇보다 배우의 눈이 많은 걸 담아낼 수 있는 눈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의 눈빛이었다.
아무것도 아닐 수도, 또 그 무엇이든 될 수도 있는 눈빛.
사소한 연기 하나하나에도 진심을 담을 수 있는 눈빛.
내가 왜 그 배우한테 빠졌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극이 끝나고 나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진됐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극장을 나오면서 스텝에게 선물로 준비해 온 시집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장석남 시인의 <뺨에 서쪽을 빛내다>라는 시집이었다.
문학을 전공한 나는 이상하게도 시에서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한껏 허세에 빠져 현학적이고 난해하게 시를 써 놓고는 이해하지 못하면 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하는 시를 쓰는 작가가 많다고 판단해서였다.
그런 나의 편견을 깨게 해 준 작가가 장석남 시인이었다.
담백하지만 삶의 본질과 인생이 담긴 그의 시에서 나는 감동을 받았었다.
그 시집을 선물해 준 이유는,
힘을 빼고 그저 삶 그대로 솔직하고 꾸밈없이 연기해 나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친구와 식사를 하면서도 내겐 단 하나의 생각만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그래, 내가 사람을 잘 선택했어.
딱 십 년만 지켜보자.
그러고 나서 아니면 깔끔히 돌아서자.
그동안은 저 배우를 최선을 다해 사랑해 주고 지켜봐 주자.
그 결심이 십 년을 훌쩍 넘기에 될 줄은 알지 못했다.
인생은 참,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