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의 역사 4

- 연기 대상, 투표

by 박드레

연극을 성황리에 끝낸 배우가 차기작을 선택했다.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였다.

타이틀 롤이었다.

상대 배우가 동갑의 한류 스타로 유명한 분이라 일단 캐스팅 자체가 기대가 되었다.

전작이 좀 어두운 면이 많이 부각되는 작품이었어서 밝고 발랄한 작품을 선택한 거 같았다.


제작 발표회, 촬영장 조공 등으로 카페는 분주했다.

오프를 뛰는 팬들은 직장인들은 별로 없었고, 프리랜서나 학생들이 많았다.

직딩들은 조공 계좌에 총알(자금)을 빵빵하게 채워주고 각종 아이디어 모집에 열과 성을 다해 참여해 주었다.

제작 발표회에 참석했던 찍사들은 부지런히 사진이나 영상을 올려 주었고, 후기들도 많이 올라왔다.

팬덤에서는 이런 공식적인 활동 일정을 미리 팬들이 알 수 있었고, 능력자들을 중심으로 오프를 뛰는 멤버들이 구성되었다.

제발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드라마 촬영이 시작되었다.

촬영장 조공 총대(리더)가 정해지고 참여 가능한 스텝들이 구성되었다.

촬영장에 밥차나 커피 차를 보내고 출연자들, 촬영 스텝들에게 간단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 촬영장 조공의 주 내용이었다.

밥차, 커피차 업체 선정, 현수막 제작, 선물 물품, 포장 컨셉, 스티커 제작 등등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따로 포털 사이트에 카페를 만들어 의견을 받고 투표를 통해 결정하고 하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다수의 의견이나 결정이 필요할 때마다 운영진의 글이 올라왔고 팬들은 바쁜 시간을 쪼개 참여하고 도움을 주었다.

모두가 각자 자기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다.

나도 간간히 카페에 들어가 진행 사항을 확인했고, 결정이 필요한 사항엔 소심하게 한 표를 행사하고 그랬다.

그 모든 과정과 진행이 투명해야 했다.

공금을 가지고 진행하는 일이니 당연한 거였다.

난 이런 일이 이렇게 진행되는 것도 처음이어서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드라마가 방영되자 카페는 열기구를 띄운 것처럼 붕붕 떠서 활기가 넘쳤다.

아웃사이더라 할 수 있는 청춘 남녀가 만나 사랑하면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다룬 드라마였는데, 기대한 것보다 모든 면에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었다.

시작 전엔 화제성이 컸는데, 막상 본방이 진행될수록 시청률이 떨어졌다.

그래도 일본이나 중국에선 한류 스타 덕을 봐서 그나마 인지도를 얻고 있는 모양이었다.

조금 실망했지만, 그래도 배우의 스타일이나 미모가 맘에 들게 나오고 있어서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하지만 드라마는 점점 산으로 가는 것을 넘어 딴 세상으로 떠나가고 있었다.

막방에 가까워졌을 땐, 음소거를 하고 비주얼만 보기도 했다.

팬으로서도 쉴드 치기에 힘에 부치는 작품이었다.


그 사이 촬영장 조공이 완료되었고, 오프 팬들의 후기와 사진, 영상 등이 카페에 올라왔다.

배우가 또래들과 즐겁게 촬영하고 있는 게 느껴져서 보기 좋았다.

촬영장 가서 고생한 스텝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래도 내가 오프 스텝으로 일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난 바쁜 직장인이었고, 촬영장을 따라다니며 잡일을 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부분 어린 팬들이 오프에서 활동을 많이 하고 있었다.

나처럼 나이가 들어가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오프까지 활동하기엔 제약이 있었고, 무엇보다 연예인을 따라다닌다는 것 자체가 쫌 거시기한 게 사실이었다.


그 사이 연말이 다가왔다.

연말엔 방송 3사가 연기대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올해 활발하게 활동한 배우는 연기 대상에 후보로 올라가 있었다.

연기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고, 봄에 방영된 드라마에서의 연기가 좋았었기에 당연히 우수나 최우수연기상은 받을 것 같았는데, 문제는 인기상이나 커플상이었다.

시청자의 투표수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카페에서는 투표 독려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방송사에 회원 가입을 해야 하는 절차가 조금 불편했다.

지인들과 가족들을 동원해서 투표를 하고 있다는 사람도 있었고, 학원 아이들에게 치킨이나 피자를 사 주고 투표하게 했다는 글도 있었다.

저마다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수를 이용해서 득표율을 높이려 애쓰고 있었다.

나도 엄마, 아빠, 동생의 여권을 가져다가 개인정보를 이용해 아이디를 만들고 회원가입을 해서 투표수를 늘렸다.

나중에 회원탈퇴를 하면 될 일이었다.

하면서도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했는데 연기대상 시상식에 참여한 배우가 상을 많이 받으면 그것도 나쁠 것 같진 않았다.

졸지에 우리 가족은 자신도 모르게 방송사에 회원으로 가입되어 버린 거였다.

물론 나중엔 깔끔히 정리를 했지만 말이다.

지금까지도 모를 거다.


우리의 그런 노력으로 배우는 연기상, 인기상을 받을 수 있었다.

모든 상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였다.


그렇게 내 덕질 인생의 첫해가 연기 대상 실시간 시청과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일 년 내내 쉬지 않고 일한 배우가 대견하고 고마웠다.

그러므로 팬들도 즐겁고 재밌게 한 해를 보낼 수 있었다.

나는 카페에 프랑수와즈 사강의 소설 구절을 패러디해서 이런 글을 올렸다.

당연히 추천을 많이 받았다.

살짝 오글 거리는 내용이었지만 다들 좋아라 했다.

나의 재능은 이거였다.

말을 가지고 노는 일.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인간이 누려야 할 편안함과 나태의 의무를 저버리고
일 년 내내 쉬지 않고 일한 죄,
인간이 가져야 할 자기만족과 교만의 의무를 저버리고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겸손으로 노력하고 또 노력한 죄,
인간이기에 누려야 할 편법과 체념의 의무를 저버리고
정직과 도전정신으로 변화와 성장을 향해 내달린 죄,
선택받은 인간으로서 받아야 할 관심과 사랑을 당연히 여기지 않고
감사하고 고마워하며 되돌려 주기 위해
고민하고 행동한 죄,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일 년 내낸 겨울잠이나 잘 ○○들을
한시도 눈 못 붙이게 하고
하늘 위까지 치솟아오를 만큼
열정과 행복과 기쁨으로 가득 차게 한 죄,

당신에게 백만 년 유배형을 선고해야 마땅하나
○○들 곁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도망칠 수도 없는 종신형을 선고하는 바입니다.


12년이 지난 지금 이 글을 다시 보니 참, 어이가 없다.

무슨 교주 찬양도 아니고.

하지만 그때는 입덕한 지 얼마 안 된 상태라 덕심 레벨이 엄청 성장하고 있던 시기였을 것이다.



인생은 덕질의 변곡 곡선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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