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이 모두 끝나고 가을이 되었을 때 덕후들이 나의 새 서식지로 놀러 왔다.
W가 아버지 차를 운전하고 R, Q, H, S 가 함께 주말을 이용해서 나도 보고 바람도 쐴 겸해서 시골 나들이를 한 것이다.
이미 이들은 내가 아이를 갖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신혼집 구경을 하고, 한정식도 먹고 근처 관광지도 들러 함께 시간을 보냈다.
여러 달 동안 스텝으로 함께 일하다 보니 어느새 많이 가까워져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저녁을 먹고 아쉬움을 뒤로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한 사람의 배우를 매개체로 시작된 랜선의 인연이 모니터를 벗어나 끈끈한 인간관계를 형성시켰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결국 인간은 인간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32부작의 사극은 흥미로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연출의 역량이 부족했던 것인지 완전 망작삘이 났다.
덕후들은 안타까워하면서 의리로 마지막까지 시청을 했다.
드라마 후반으로 갈수록 소속사에서 배포하는 현장 사진을 통해 배우가 엄청 지치고 힘들어하는 것이 보여서 마음이 아팠다.
드라마가 잘 됐으면 힘들어도 기운이 났겠지만, 시청률이 곤두박질치고 있는 상황에선 배우들도 당연히 힘이 빠질 터였다.
어쨌거나 드라마는 종영을 했다.
배우가 이젠 쉴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카페가 뒤집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열애설이 터진 것이다.
드라마에 같이 출연했던 연하의 남자 배우와 커플템을 장착하고 공항을 활보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처음에 글이 올라왔을 때만 해도 다들 배우가 그동안 보여준 신중한 성격으로 인해 믿지 않는 팬들이 많았다.
그러나 곧 공식적인 보도 자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카페는 그야말로 원자 폭탄이 투하된 것처럼 난리가 났다.
열애도 열애지만 둘이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 현지에서 사진이 찍히고 그게 실시간으로 보도되었다.
그동안 덕질에 몰두해 있었던 덕후들은 배우의 열애를 받아들이는 양상이 극명하게 나뉘고 있었다.
배신감을 느끼고, 팬들에 대한 배려 없이 그렇게 대놓고 공개연애를 요란스레 해야 하냐며 질타하는 덕후들도 꽤 있었고, 상대 배우가 우리 배우에 비해 인지도도 떨어지고 나이도 어린것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팬들도 있었고, 이때다 싶어 팬을 가장해 배우를 신랄하게 까는 글을 쓰는 팬들도 있었다.
가장 예쁠 나이인데 당당히 연애를 하는 모습이 멋지다며 축하하는 덕후들도 있었다.
그나마 얼마 안 남아 있던 삼촌팬들은 이젠 보내야 한다며 탈덕을 선언하기도 했다.
카페는 한순간에 쑥대밭이 되었다.
각자 자신의 입장을 얘기하며 날을 세웠고, 그동안 배우 하나만 보고 덕질을 5년 이상 해 온 덕후들은 거의 멘붕인 것 같았다.
나는 배우가 연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 나이에 연애를 안 한다면 그건 꽃 같은 청춘의 낭비일 뿐이다.
하지만, 나도 다른 덕후들처럼 알 수 없는 허탈함을 느끼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여자 연예인의 공개 연애는 남성에 비해 데미지가 큰 것은 사실이었다.
결별을 하더라도 꼬릿표가 따라붙고 가십거리로 사람들 입방아에 오래도록 오르내렸다.
연애를 하더라도 조용히 들키지 않고 하길 바랐다.
나는 배우가 상처를 입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워낙에 깨끗한 이미지로 스캔들 하나 없이 스타의 자리를 유지해 온 사람이었기에 이번의 요란스러운 공개연애는 너무나 파격이었다.
아무리 어른스러워 보여도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는 거였다.
경솔해 보여서 조금 실망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열애설이 나고 며칠이 지나자 덕후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평정심을 찾아갔다.
카페도 점점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배우에 대한 실망감은 있었지만 배우의 선택을 인정하고, 이제는 배우가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지 말고 맘껏 사랑하고 행복해하길 바라는 덕후들이 많았다.
나 역시도 그랬다.
배우가 행복하길 바랐다.
내가 4년을 사랑해 온 사람이었고, 누구보다 배우의 연기를 좋아하고, 그의 연기를 오래도록 보고 싶었기에 진심으로 배우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의 경험이 배우를 더욱 성숙시키고 연기의 폭을 넓혀 주길 바랐다.
다만, 한 동안 연기는 안 하겠구나 싶어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오랜 기간 활동을 중단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카페도 팬들이 대거 이탈하고 잠수를 타서 고요했다.
나의 덕질 인생이 1막을 넘겨 2막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와 더불어 현실의 인생도 2막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출산일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덕후 주니어는 뱃속에서 빠른 속도로 자라고 있었다.
열정의 다른 이름인 덕질은 끊기가 어렵다.
덕심의 질량보존 원칙에 의거해서 다만, 다른 대상으로 이동할 뿐이다.
나는 아들 덕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