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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드레 Dec 12. 2023

라디오에 사연 보내는 여자

"창밖의 별들도 외로워 노래 부르는 밤

 다정스런 그대와 얘기 나누고 싶어요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우리 세대는 라디오를 들었다.

밤마다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고 라디오를 들으며 전국의 청소년들과 함께 각자의 사연을 나누며 공감을 하고 울고 웃으며 추억을 공유했었다.

라디오엔 그 시대의 감성이 있었다.

시대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면서 라디오의 청취 형태도 다양해졌다.

어플을 깔거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컴퓨터나 모바일로 접속해서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접근성이 좋아졌지만 라디오를 듣는 사람은 줄었다.

차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주로 듣는다.

나도 사회생활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하면서는 라디오를 들을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가 아이가 학교에 가 있는 오전 시간이 나에게 주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라디오를 켜 놓게 되었다.

주로 블루투스 스피커를 이용해 듣는데 하나의 주파수에 맞춰져 있다.

바로 KBS 클래식 FM 채널이다.

아이가 등교를 하고 나면 자연스레 라디오를 켜 놓고 집안일을 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클래식에 조예가 있다든지 하는 고상한 취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듣기에 좋고 조용하기 때문에 듣는다.

언제가부터 음악 취향이 시끄럽지 않고 귀에 부담이 가지 않는 음악들로 바뀌게 되었다.

특히 9시-11시에 배우 윤유선 씨가 진행하는 <가정음악>과 12시-2시까지 윤수영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생생클래식>을 듣는다.

두 분의 음색이 차분하고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라디오를 듣던 10월의 어느 날에, 이루마 씨가 스튜디오에 나와 직접 연주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워낙 유명한 분이시고 대중적인 음악가가 아닌가.

피아노 연주곡을 듣다가 나도 사연을 보내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을 고 신청곡을 소개받으면서도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그날따라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냈다.


고구마를 삶으려고 흙 묻는 고구마를 싱크대에서 씻으려다가

이루마 님의 피아노 첫 선율이 나오는 순간,

저도 모르게 딱 멈춰서 숨도 안 쉬고 정지 동작에서 고구마를 손에 든 채로 들었네요.

너무 좋네요. 고구마는 이제 씻어서 에어프라이어로 향했네요.

저 고구마는 더 맛있을 거 같네요.

클래식을 들은 고구마라서.


이렇게 보냈다.

그날 있었던 일 그대로를 문자로 적어서.

그랬는데 조금 있다가 윤수영 아나운서가 내 사연을 소개하는 것이 아닌가.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뭐든지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은 쉽다.

그 후로 아이가 독감에 걸려 5일을 쉬고 학교 보낸 사연을 보냈는데 그것도 소개가 되었다.

사연을 보내는 사람이 적어서 잘 채택이 되는 건가 싶었다.

아무래도 점심시간에 라디오를 듣는 사람이 적을 테니까.

그런데 그 후로 몇 번 보냈을 땐 소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언니가 허리가 아파 복대를 차고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려다 검색대에서 걸려 룸으로 끌려가 몸수색을 당한 사연을 보냈는데 그게 또 소개가 되었다.

이번엔 <생클>이 아니라 <가정음악>에 소개가 되었다.

아, 사연이 조금 특색이 있어야 채택이 되는구나 싶었다.

그러고 나서도 몇 번 문자를 보냈었는데 또 한동안은 소개가 되지 않았다.

신청곡을 적어서 보내기도 했는데 채택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바빠서 한동안 라디오를 못 듣다가 오늘 <생클>에 아주 소소한 내용을 적어서 보냈는데 방금 전에 소개가 되었다.

그냥 흘려들을 땐 몰랐는데 내가 보낸 사연이나 신청곡이 진행자의 입을 통해 방송으로 공개가 될 때, 묘한 뿌듯함이 생긴다.

그냥 지나가는 일상의 에피소드들이 다른 사람들과 공유가 되는 경험은 '사소함'을 '특별함'으로 느끼게 만드는 것 같다.

이게 라디오의 매력이고 장점이다.

타인의 경험을 같이 나누며 공감을 하고 위로를 받으며 또 위로를 줄 수 있는 것.

같은 음악을 들으며 추억을 느끼고 감동을 받고 힐링을 할 수 있다는 것.

라디오엔 그런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래서 나처럼 라디오를 들으며 사연을 보내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는 것이다.

나는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는 여자가 되었다.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내게 즐거움을 주는 또 하나의 일을 찾아냈다.

그게 너무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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