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성적'이 들어가야 인기를 얻는 현실
오늘 서점에서 '공부머리 독서법'이라는 책을 샀다. 한때 엄마들 사이에서 '강추'하던 책이었다.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코너 한 구석에 특별히 전시되어 있는데다 '100쇄 돌파'라는 띠지로 쌓여있었다. 예전에 엄마들이 추천했던 생각이 나서 한권 집어 들었다.
읽으면서 내가 몰랐던 입시의 현장을 엿볼 수 있어서 새로웠다. 한편으로는 점점 너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계속 책읽기를 성적과 결부시키고 있었다. '책을 읽어야 언어능력이 향상되고, 지문이해력이 좋아져서 성적이 향상됩니다. 애들이 중학교, 교등학교 올라가서 성적이 떨어지는 건 책을 안 읽어서 문해력이 떨어져서 그렇습니다.' 아직 책의 초반만 읽었지만, 초반의 내용은 딱 저 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책을 많이 읽으면 당연히 어휘가 풍부하고 문해력이 높아지고 어려운 지문도 잘 이해하니까, 수학 이외의 대부분의 교과에서는 이해도 빠르고 습득도 빠를 수 밖에 없다. 성적이 높은 건 책읽기의 순기능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책읽기의 장점을 성적을 높이는 수단으로만 이용한다는 건... 뭐랄까... 심마니가 어렵게 캔, 귀한 산삼을 지나가던 길고양이의 간식으로 주는 정도에 비유하고 싶어진다.
나도 실은 최근까지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면서 동화책을 읽어주고 같이 도서관에 들르면서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을 한권씩 빌려보았다. 그리고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는데, 그날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일 문제로 인해 꽤 우울한 시기였다. 애들을 재우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그냥 TV나 보자 싶어 채널을 돌리다 '어쩌다 어른'에서 '채사장'의 강의를 보게 되었다. 젊은 사람인데 철학과 인문학을 쉽게 잘 설명해주어서 관심이 갔다. 그후로 '열한 계단' '시민의 교양' 등을 읽었고, 그 책에서 많이 축약된 철학 이야기 뿐만 아니라 채사장의 개인사와 책을 읽고 쓴 과정들도 알게 되었다. 채사장은 책을 통해 자신을 세우고, 아픔을 치유하고, 세상 밖으로 나와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나는 그전까지 서점에 가면 괜시리 어려운 책, 전공서적, 남들이 보면 꽤나 멋있어 보일 법한 난해한 책들을 골랐다. 당연히 내용을 이해할 수준이 되지 않으니, 몇장 읽고는 덮어버리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지금껏 난 독서를 한 게 아니었다. 무식하니 유식하게 보이고 싶어서 책을 이용했던 것이었다. 채사장의 책을 읽은 후로 그냥 내가 보고 싶은 책을 봤다. 채사장의 글들이 너무 좋아서 채사장 책을 다 봤고, 나라는 사람이 궁금해서 쉬운 철학책을 봤으며, 사주에 관심이 있어서 고미숙 선생님 책을 읽었고, 사주팔자를 보는 책도 보았다. 내가 쉽게 읽을 수 있고 재미있는 책들을 빌렸다.
책을 통해 어휘력이 늘었을까? 그래서 지금 수능을 보면 성적이 높을까? 어디 글짓기 대회라도 나가야하나? 아님 책을 내려고 아등바등 해야하나? 책읽기는 그것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책읽기를 통해 내 삶을 어떻게 바라봐야할지, 좀더 능동적인 대상으로 나를 생각할 수 있는 획기적인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책읽기는 내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진짜 인간답고 지혜롭고 조화롭고, 그리고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런 책읽기를 성적향상을 위한 획기적인 방법이라며 몇백페이지나 되는 책을 만들고, 또 그 책이 100쇄나 되는 판매고를 올린 대한민국의 현실이 참으로 슬프다. 아마, 책읽기의 진짜 멋진 본질을 가지고 책을 썼다면 책이 얼마나 팔렸을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