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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거북이 Mar 11. 2020

가부장제에서 여자로서의 삶(1)

개인적 경험에 기반하여 심리적, 사회적 관점으로 설명하는 글

나는 82년 생 000이다. '82년생 김지영'씨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나에겐 한 살 어린 남동생이 있다. 나의 아빠는 장남이었고, 고로 내 동생은 장손이 되었다. 우리 집에서는 드라마 '아들과 딸'처럼 대놓고 이것저것 아들만 챙겨주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동생은 아들이자 장손이었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먹고 들어가는 어드밴티지가 있었다. 예를 들어, 가족들의 관심이 확실히 동생에게 몰려있었다. 엄마는 아들을 낳음으로써 진짜 맏며느리의 할 도리를 했고 비로소 맏며느리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여러모로 엄마와 아빠는 나보다 동생을 더 예뻐했다(구구절절 사연은 많다). 일가친척도 동생에 대한 관심이 컸고, 명절과 같은 모임에서는 항상 동생이 주목을 받았다. 나는 구석에 쭈구리처럼 앉아서 동생이 주목받는 모습을 보는 배경 중 하나였다.


엄마는 여자이지만 여자를 하대했다. 예를 들면, '맏딸은 살림밑천'이라는 말을 엄청 많이 했다. 대학을 입학 즈음 '너는 대학을 졸업하고 적당히 지내다 시집가면 끝이다.'라는 말도 했다. 이제야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가늠이 된다. '넌 굳이 좋은 직장 안 가져도 된다.' '결혼하면 그 후는 나와는 상관없다.' 혹은 '결혼하면 내 딸이 아니라 그 집 며느리야.'라던가 뭐 이런 식의 해석이 되는 것이다.


어릴 땐 별 생각이 없었다. 동생이 남자라는 이유로 더 사랑받고 관심받는 것이 많이 질투가 났을 뿐이었다. 뭐가 뭔지 몰랐기 때문에 그 정도의 생각만 가능했다. 하지만 대학이라는 곳이 아무리 취업사관소처럼 변했을지라도, 명색이 학문의 상아탑이지 않는가! 전공인 심리학도 배우지만 철학, 사회학 등등. 다양한 분야의 수업을 들었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여러 가지 가치와 관점을 배우면서 20년간의 내 삶을 '동생과 내가 받은 애정의 차이' 정도에서 '남녀에 대한 사회의 고정관념' '가부장제' '페미니즘' '계층갈등' 등등 수많은 스펙트럼으로 다양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대학을 다니던 동안엔 한동안 페미니즘에 부쩍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여성과 남성을 구분 짓고, 지배자와 피지배자와 같은 계층갈등으로 남녀의 갈등을 해석하고. 여성성과 남성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책을 읽었고. 좀 더 시간이 흐르면서 과연 여성-남성의 대결구도로 보는 것이 맞는 것인가? 여성과 남성의 갈등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가치를 가진 사람과 아닌 사람의 갈등이 아닌가? 이런 글도 보았다. 그리고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가부장제의 피해자라는 글도 보았고. 지금에야 페미니즘이 사회적 담론으로 논의되는 시대이지만, 그 당시에는 페미니즘이 꽤 급진적인 느낌이었고, 소수의 사람이 지향하는 분야였으며(한마디로 학문에서도 주류가 아니었음),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그 당시의 페미니즘도 그리 성숙하고 조화로운 느낌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오랫동안 애정의 박탈과 차별로 인해 가득히 쌓여있던 강한 분노와 공격성이 억눌려 있다가,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면서 건드려지고, 그게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되었던 것 같다. 페미니즘 책을 읽으면서 내 안의 공격성과 강렬한 분노를 안전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공부하는 거니까, 내 가치를 만들어가는 거니까...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뭔가 모를 부조화를 느끼고 있었다. 남녀의 갈등으로 보면, 세상 모든 것이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도 '82년생 김지영' 책을 읽으면 '꼴페미' '메갈'이라며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20년 전에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무엇하나 편한 게 없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내가 누군가와 연애를 할 때, 페미니즘이 별로 소용이 없었다. 잘 적용이 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와 만나는 과정은 한 사람에 대한 애정과 헌신이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페미니즘은 나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 중 하나'로 자리 잡고는 그렇게 멀어져 갔다. 엄마가 나에게 '시집가면 땡'이라고 했듯이 세상은 여자가 여자에게 더 악독했다. 엄마가 저런 몹쓸 말을 하면 아빠가 '무슨 소리. 공부하고 대학 갔는데 니 일은 해야지.'라고 말을 해주었다. 내가 일하는 직종은 10명 중 9명이 여자일 정도로 여자가 많은데, 병원에서 수련받을 당시 결혼과 출산을 했던 동료들이 받는 수모는 엄청났다. 결혼하기 전에 온갖 욕을 들어먹었고, 결혼을 하면 출산은 접었으며, 출산을 하면 수련을 그만두었다. 슈퍼바이저는 수련생이 연애하는 것도 '수련하는데 시간이 남아도나 봐?' 이런 식으로 비꼬았다. 정말 아이러니 한 건, 그 슈퍼바이저는 남자가 아니었다. 본인도 결혼하고 아이가 있는 여자였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걸까? 근데 웃기게도 '남자의 적은 남자'라는 말은 없다. 그건 당연할 수 밖에. 남성은 가부장제라는 틀이 부담스러울 수는 있지만 내재화 하기 쉽고, 여성만큼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부장제라는 구조가 남성인 가장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는? 아무래도 여자는 남자보다 좀 생각이 많아지고 복잡해진다... 여성에게 마냥 편한 그런 구조가 아니다. 남성이 가장인 사회에서 여자는 변두리니까. 여자는 중심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잘 안 뭉쳐진다. 각자 도생이다. 여자는 그 안에서 살아남는 방식대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예를 들어, 나의 엄마는 가부장제의 틀 속에 딱 들어맞게 살아갔다. 무시당하는 게 무시인지도 모르고, 차별이 차별인지도 모른 채,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생각으로. 교육받지 못했고 무지했기에 그게 진리인 것처럼 너무 당연하게 살아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슈퍼바이저처럼, 가부장제 사회에서 일하는 여성으로서 온갖 모멸감과 수치심을 견디며 직장에서 자리 잡은 여성 상사. 그런 사람들은 가혹하게 단련시킨 사람과 지배구조에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래야만 자신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고통에 빠져들지 않기 때문이다. 출산하고 1달 쉬고 복직하고 밤낮 정신없이 일하며 온갖 술자리와 회식에 참석하고 독하게 버티면서 살아남은 여성 상사. 그들은 남자는 아닌데 남자 비슷한 어떤 존재로 살아왔다. 그렇게 처절하게 생존한 여성관리자는 회사와 사회의 기득권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하늘을 찌를 듯한 자신감과 자기애를 가진다. 그리고 여성 상사는 자신이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 남자 상사보다 더 심하게 악랄하게 여자 후배를 갈구고 괴롭힌다. 내 생각에 직장에서 여성으로서 제일 경계해야 할 대상 중 하나는 중년의 남자 부장이 아니다. 80-90년대, '여자가 결혼하면 집에서 애 본다.'는 생각이 팽배했던 시절에 결혼하고 출산을 해도 회사에서 악바리처럼 버틴 여자 부장이다.


나의 엄마나 나의 슈퍼바이저는 모두 가부장제라는 구조 속에서 잘 적응된 사람들이었다. 당시에는 가부장제가 너무나 당연했고, 남자가 사회생활을 해서 가정경제를 책임진다는 생각이 기정사실이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더 배운 사람이든 덜 배운 사람이든 그 구조 속에서 각자의 삶의 방식대로 그렇게 적응하면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이젠 조금은 달라지는 것 같다... (다음 이야기는 2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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