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태어나던 날 흰 눈이 내렸지!

<세월호 마지막 네 가족>, 단원고 2학년 6반 박영인에게

by 꿀벌 김화숙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 영인아!


네가 태어나던 날 1998년 1월 5일엔 흰 눈이 내렸지.


포근히 흰 눈 이불을 덮고 너는 엄마 아빠의 둘째 아들이자 형의 동생으로 태어났구나. 장이 막혀 너는 태어나자마자 수술을 받고 보름가량 인큐베이터에 있어야 했더구나. 그 조그마한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수술을 받고, 엄마 품에 있지도 못했다니. 엄마 아빠 맘이 어땠을까, 상상하기 어렵구나. 네가 몸이 약할까 봐 엄마 아빠가 늘 마음 쓰셨겠지? 공장에서 일하는 고단한 일상이었지만, 네가 쑥쑥 커가는 걸 보느라 두 분은 피곤을 잊으셨다지.




영인이는 운동을 특히 좋아했지. 학교에서도 볼링부에서 활동했다니 놀라워.(솔직히 고백할게. 나는 평생 볼링을 아직 한 번도 못 해봤어.) 야구 경기 보는 것도 좋아해서, 집에서 아빠 곁에서 야구 경기를 재미있게 봤구나. 아빠랑 영인이랑 같이 경기장에 관람하러 다니기도 했고 말이야. 너는 야구 축구를 좋아하는 튼튼한 운동 청년으로 자라고 있었지. 좋은 축구화를 갖고 싶어 오래 기다렸던 영인아! 새 축구화 신고 축구하자꾸나!





영인아!


2018년 1월 5일 네 생일은 무슨 날이었더라? 너의 49재가 있던 날이었구나.


세월호가 침몰한 뒤 부모님은 네가 살아서 돌아오길 기다렸구나. 시간이 갈수록 이제 그 기다림은 네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 집에 돌아가는 것으로 바뀌었지. 그러나 너는 세월호 마지막 미수습자 5명 중 이름이 남았어. 2017년 11월 18일엔 미수습자 다섯 분의 시신 없는 합동 추모식이 거행됐지. 너는 안산으로 돌아가 장례식을 했고, 2018년 1월 5일, 너의 스무 번째 생일은 너의 49재 날이 되었구나.







너의 생일날 너는 없었구나. 대학생이 되어 꿈을 향해 달리고 있을 너는 없었구나. 너의 49재 날, 엄마는 아침에 영인이의 생일상을 차렸구나. 네가 평소 좋아하던 불고기와 잡채, 미역국과 초코케이크도 준비하셨지. 가족들은 영인이의 사진을 올려놓고 상에 둘러앉았지. 그날 국과 반찬이 평소보다 너무 짰다는구나.





엄마의 목소리로 들어볼래?


애가 있었을 때는 회사 다니느라 생일상 한 번 제대로 차려주지 못했는데..... 떠나고 나서ㅏ야 이렇게 생일을 챙겨주네요. 아침 내내 울면서 음식을 만들어서 너무 짜더라고. 결국 잘 먹지도 못했어요.





영인아! 누가 상상이나 했겠니. 세월호가 침몰한 지 3년 7개월이 지난 2017년 11월 16일, 미수습자 가족들이 기자회견을 했어. 해양수산부의 세월호 수색 종료 방침을 오열 속에 받아들이겠다고 말이야.


일각에서는 저희 가족들을 못마땅하게 보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족이 너무 보고 싶어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뼛조각 하나라도 찾아 따뜻한 곳으로 보내주고 싶다는 간절한 희망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세월호 선체 수색이 마무리돼가는 지금 저희 가족들은 비통하고 힘들지만 이제 가족을 가슴에 묻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저희 미수습자 가족들은 수많은 갈등 속에서 더 이상의 수색은 무리한 요구이며, 저희를 지지하는 국민들을 더는 아프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다고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것은 아닙니다. <세월호 마지막 네 가족> 36-37쪽




영인아, 바다는 너만 빼고 네 흔적만 보냈더구나.


2014년 추석을 앞두고 네 가방이 나왔지. 네 지갑도 나왔지. 진도 체육관에 남은 사람이 점점 줄어들어갔지. 엄마 아빠에겐 피 말리는 시간이 이어졌어. 체육관 벽 쪽 계단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계속 시신을 찾는 거 같았대. 명당자리, 부모님은 중앙 통로에서 그쪽으로 자리를 옮겨보기도 했어. 2017년 4월 세월호가 인양돼 수중 수색과 선내 수색이 시작됐어. 네 교복이 가장 먼저 나왔어. 냄새가 짙게 밴 아들의 교복을 부여잡고 아빠는 울었구나.





아들의 시신은 고사하고 뼛조각 하나 못 찾았는데, 아들 없는 빈 장례식이라니.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니. 아빠는 너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을 때가 가장 힘드셨대. 이제 영인이는 없구나. 그걸 인정해야 했을 때 말이야. 시신이라도 찾아 돌아갈 줄 알았는데, 또다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셨대. 너 없이 안산으로 돌아가 어떻게 살아갈지 엄두가 나지 않으셨대. 너를 찾을 생각뿐이었으니까. 진상 규명의 시급함도 그 다음 일이었다는구나.




엄마와 아빠는 세월호에서 나온 너의 가방과 교복, 지갑을 챙겼어. 사주고 싶었던 축구화와 평소 잘 입던 옷도 챙겨 상자에 넣었지. 이제 너를 하늘나라에 보낼 준비를 마쳤을 때 네 관에 너는 없었어. 유품과 꽃으로 채워졌지. 아빠는 "사랑해"를 고백하며 형과 엄마는 "미안해"로 함께 오열했구나. 화장 후 유품의 재와 함께 봉안함에는 세월호 해저 흙과 단원고 흙이 담겼지. 양승진 선생님과 같은 반 친구 현철이와 함께 단원고를 들렀구나.




영인아!


'별을 품은 사람들'은 지난달 <세월호 마지막 네 가족>(이경태 외, 북콤마, 2018)을 읽었어. 너무 아프지만 반갑고 고마운 책이지. 영인이는 '416단원고 약전'에 없잖아. 6반 이야기인 <그만 울고 웃어줘>엔 미수습자인 남현철과 박영인이 빠졌잖아. 그래서 별품사는 몇 년 전 편지쓰기 할 때도 너희 이야기를 따로 찾았더랬어. 우리는 다시 다짐했어. 박영인, 남현철, 양승진, 권혁규, 권재근. 이 다섯 이름을 잊지 말자고. 기억하자고.




그런데 영인아 알고 있니!


전연순이란 이름 말이야. 미수습자 가족들과 마지막까지 함께한 한 사람이야. 미수습자 5명 합동추모식에서 추모시를 낭독하는 사람을 영상에서 봤어. 전연순이란 이름이었어. <세월호 마지막 네 가족> 책 속에 이 이름이 몇 군데 나왔거든. 이분이 누구지? 수수께끼가 풀리는 기분이야. 책에 나온 대목 살짝 볼래?


오랜 시간 미수습자 가족과 함께 하며 대변인 역할을 한 전연순 씨는 2017년 10월 14일 해양수산부로부터 병풍도 앞바다의 해저 흙을 넘겨받았다. 그녀는 미수습자 가족과 긴 시간 폭포신항에 머물며 때로는 대변인, 때로는 가족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 앞서 해양수산부는 연순씨의 요청에 따라 수중 수색을 하던 도중 세월호 사고 현장의 수심 40미터 바닥에서 흙을 채취해 그녀에게 전달했다. <세월호 마지막 네 가족> 117쪽



그러던 중 자원봉사자 전연순 씨가 아내에게 집 안 곳곳을 뒤져 남편의 흔적을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침대 밑에서 남편의 것으로 보이는 머리카락을 모으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을 비롯해 매트리스에 박혀 있던 체모까지 모으니 제법 털 뭉치가 나왔다. 아내는 곧장 털 뭉치를 국립 과학수사연구원에 맡겼다.

<세월호 마지막 네 가족>259-261쪽



전연순 씨는 대전과 서울을 주 무대로 활동하는 한국무용가야. 금비예술단의 단장이자 대한불교조계종 구호 재난 봉사대 일원이야. 2014년 4월 16일 그날 그는 뉴스를 보고 바로 세월호 현장으로 달려갔대. 당시 불자로서 출가를 준비하고 있었대. 세월호 현장에 달려가 보고는, 좀처럼 그곳을 떠나지 못해 5년을 머물렀다는구나. 정말 미수습자 5명이 합동 추모식을 하고 그곳을 떠나는 순간까지 말이야.


인터뷰 기사에서 이런 인상적인 말씀을 하시더구나.


"세월호의 고통 앞에서 출가란 무엇인지 묻게 되더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깨달음이 왔다."


그렇게 진도 팽목항을 뛰어다니며 희생자 가족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수중 수색을 마치고 선박 위에 오른 민간 잠수부들에게 식사를 배달했어. 바다에서 시신이 올라오면 그들의 넋을 달래는 '진혼무'를 추고, 직접 쓴 추모시를 읊었어. 아.....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랑스러운 영인아!



<세월호 마지막 네 가족>에 실린 추천사 일부를 읽어 볼게. 4주기 때 글인데, 7주기가 지난 지금도 그대로 울림이 있구나. (사) 4.16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으로서, 별이 된 단원고 2학년 3반 유예은 아빠 유경근 님이 쓴 글이야. '발문을 대신하여'라는 꼭지의 "만일 일어날지도 모를 '영원한 미수습'...."이란 제목이야. 추천사 부탁을 4주기 직전에 받았지만 열흘이 지나도록 한 줄도 못쓰다 쓴 글이라는구나.



항간에는 이미 장례식까지 다 치렀는데 이제 와서 수습을 하는 게 오히려 미수습자 가족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게 아니냐는 말들도 있습니다. 저한테는 산 자의 변명으로밖에 안 들립니다. 어쩔 수 없이 치렀던 '빈 장례식'이었습니다. '빈 장례식'을 강요했던 우리는 '이제 그만 끝내자'라는 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만일 일어날지도 모를 영원한 미수습.... 우리는 이것까지 책임져야 합니다. 저는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한들 그분들의 고통이 백반분의 일이라도 줄어들겠습니까. 그저 그 고통을 안고 우리와 함께 살아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떤 일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뿐입니다.

<세월호 마지막 네 가족>



(별이 된 단원고 2학년 6반 박영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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