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베드로의 자리에 서 있었다면 베드로처럼 행동하지 않았을까?
포르티아 넬슨
(미국, 1920~2001)
1장
난 길을 걷고 있었다.
길 한가운데 깊은 구덩이가 있었다.
난 그곳에 빠졌다.
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2장
난 길을 걷고 있었다.
길 한가운데 깊은 구덩이가 있었다.
난 그걸 못 본 체했다.
난 다시 그곳에 빠졌다.
똑같은 장소에 또다시 빠진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빠져나오는데 또다시
오랜 시간이 걸렸다.
3장
난 길을 걷고 있었다.
길 한가운데 깊은 구덩이가 있었다.
난 미리 알아차렸지만 또다시 그곳에 빠졌다.
그건 이제 하나의 습관이 되었다.
난 비로소 눈을 떴다.
난 내가 어디 있는가를 알았다.
그곳에서 빠져나오는데 또다시
오랜 시간이 걸렸다.
4장
내가 길을 걷고 있는데
길 한가운데 깊은 구덩이가 있었다.
난 그 구덩이를 돌아서 지나갔다.
5장
난 이제 다른 길로 가고 있다.
추신) 사랑하는 벗들이여,
이 새로운 길도 그 자신만의 함정들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니
부디 조심하기를..........
어제 아침 시 읽는 단톡방에 올라온 시다. <다섯 장으로 된 짧은 자서전>를 나는 인생의 실패를 어떻게 볼 것인가? 질문으로 읽었다. 내 삶을 짧은 5장의 시로 정리하면 나는 어떻게 쓸까? 50대까지를 5장으로 나눈다? 쉰 무렵 겨우 나는 구덩이에 안 빠지는 새 길을 찾아 걷고 있다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길 마저 숨은 구덩이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추신, 절창이라 하련다.
포르티아 넬슨이라는 미국 시인의 이름을 아무리 검색해도 잘 알 수 없었다. 인터넷 서점에도 도서관에도 안 나왔다. 포스팅은 많은 걸 보면 시가 돌고 도는 것이리라. 초면이었지만,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삶은 그렇게 실패 구덩이를 반복하는 것. 그러니, 스스로를 너무 탓하지도 자랑하지도 말지어다. 실패는 삶의 소중한 한 부분일 뿐이다.
실패할 수 있다는 것, 그건 살아있는 존재의 특권인지도 모른다. 어린 아기가 걸음마를 배울 때, 말을 배울 때, 누가 부인하랴. 실패가 두려워 안 하는 아기 못 봤다. 수없이 넘어지고 수없이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한다. 그럴수록 아이가 잘 자라고 있다고 손뼉 치며 지켜봤을 거다. 허나, 특히 애들 키울 때 실패를 맘껏 해보라고 적극 격려해 주지 못한 게 가장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크는 거라고, 실패해 보라, 그랬다면.....
그래, 내게도 말해 주고 싶다. 예순이면 실패 없는 길만 갈까? 곳곳에 웅덩이가 숨어있다잖아. 실패를 즐기자고 격려하는 아침이다. 잘난 걸 증명하려 할수록 더 미궁에 빠지길 얼마나 했던가. 큰소리치면 돌아서서 실패하고 남몰래 울었더랬지. 베드로가 이렇게 위로가 되긴 처음이다. 그의 실패는 내 것, 그의 회복도 내 것. 바로 그거다. 소심하고 겁많지만, 용감하게 한 걸음 나갈 힘을 얻는다.
마침 어제 설교 주제와 시가 닮아 보여 교제 시간에 내가 냉큼 낭독했다. 교제란, 예배 순서 끝에 성도들이 함께 수다 떠는 시간을 말한다. 교회에서 모일 땐 주로 점심을 먹거나 다과를 나누며 떠드는 시간이었다. 주로 설교에 대한 감상을 나누고 한 주간의 근황이며 기도 제목이 오고 가는 시간이다. (코로나 시대 어느새 1년 반을 줌으로 교제하고 있다. 워낙 규모 작은 모임이라 줌으로도 회중이 다 떠들 수 있다.)
이 시를 성도의 교제 시간에 낭독했다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일라. 실은 엊저녁, 글벗들의 밴드에다 나는 이 시와 함께 이런 몇마디 휘갈기듯 남기기도 했다. 피할 수 없는 실패라면 배.째.라.는 어떤지?
100세쯤이면 드디어 구덩이 따위 없는 새 길을 갈까? 좋아하지 말자. 그 새 길에도 구덩이는 있을 것이고 나는 빠진 델 또 빠지며 나이를 처먹어 갈 것이다. 아니, 쳐잡수실 나이도 이젠 없겠지. 인생, 이토록 허망한 뺑뺑이인 것이다.
추신) 사랑하는 벗들이여,
이 새로운 길도 그 자신만의 함정들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니
부디 조심하기를..........
뭘 조심씩이나 하고 그랴. 그냥 닥치는대로 살어......
교제 시간에 오가는 이야기를 슬쩍 엿들어 보자.
"예수 말씀은 참 좋지만 막상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삶에서 실패가 참 많았다. 베드로의 실패를 다 알면서 끌어안은 예수 마음이 너무나 와닿아 좋다."
"나는 실패를 드러내기 싫어했다. 잘해야 한다는 완벽주의가 있었다. 어릴 때, 실패해도 된다, 실패할 수도 있다, 그 정도가 아니라, 맘껏 실패해도 돼! 적극적인 격려를 받지 못했다는 게 아쉽다."
또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감상을 그 시간에 나눠준 벗도 있었다.
"영화 속 목사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좀 강하게 붙잡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며 봤더랬다. 그러면 작은 아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거 같아서다. 그런데 예수가 베드로가 실패할 걸 알고도 강제로 막지 않은 마음을 생각하게 됐다. 실패까지도 다 끌어안는 사랑이었구나 싶다. 도와주고 싶지만, 어떤 식으로 도와줄 것인가, 그건 쉬운 문제가 아닌 거였다. 사랑할 수는 있는 거였다. 용기 내서 나도 최근에 경험한 내 실패담을 나누겠다...."
이런 식의 뒤풀이가 줌을 타고 흐르는 강이 됐다. 덕이와 숙이는 <흐르는 강물처럼>을 그 밤에 다시 봤다. 그전에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짚어보는 기회였다. 사귐의 강은 이렇게 우리 사이를 흘러흘러가는 강이었다고 하면 너무 거창한가? 몇 년 만에 봐도 역시, 원작을 읽고 싶은 목마름이 남는 영화였다. 아름다운 강 풍경과 시적인 은유들. 부자관계, 형제 관계, 그리고 사랑과 이해의 통찰로 가득한 명작이었다.
나는 그 목사의 아내에게 자꾸 눈이 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왜 그다지도 '입'이 없고 '목소리'가 없어야 했을까. 자꾸 보였다. 너무나 '남탕' 영화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사의 부인만 아니었다. 여성 캐릭터가 제대로 살아있는 인간이 하나도 안 보였다. 그들 삶의 현실이었고, 아직도 현실이자 인생이 계속 빠지는 '구덩이' 아닌가 생각하며 보았다. 그래서 더욱 이 좋은 영화의 옥에 티로는 너무 아쉬웠다.
영화 결말에 그 아버지가 임종 전 했다는 마지막 설교 대목을 건져 본다.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사랑하는 이가 곤경에 처한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주여, 저 사람을 도우려 하나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이를 돕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주어야 하는지 모르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가 주려던 것을 거절당하기도 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해야 합니다. 오롯이 이해할 수는 없어도 오롯이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자, 그럼 어제 주일 예배 설교 파일에서 마지막 몇 단락만 옮겨 적어 본다.
설교자는 내 짝꿍 덕이다. (덕이는 어느 교회 담임 목사이고 내 남편이다.) 주일예배 후에 그날 전한 설교문 파일이 교회 단톡방에 올려온다. 예배 중에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도 물론 있겠고 다시 음미하며 공부하는 사람도 있겠다. 나는 그 파일을 주로 월요일 아침에 다시 읽는다. 나 홀로 '뒤풀이'랄까, 탐구랄까, 사색이랄까.
음미하고, 한 줄 글도 쓰고, 설교 파일과 함께 먼 데 있는 벗들과 정기 인사를 주고받기도 한다. 그러고 나면 진짜 한 주가 지나고 새 한 주가 시작되는 기분이 된다. 써야 할 글도 많이 밀린 이 월요일 아침, 내겐 아직 어제의 뒤풀이 강가에 노닐고 있는 셈이다. 내게 자꾸 말을 걸어오는 단어들이 나를 붙들어서 더 그렇다.
새벽닭, 부인, 실패, 성공, 각오, 큰소리, 통곡, 사랑, 수용, 나, 너, 흐르는 강물처럼, 강, 이해, 구덩이, 자서전, 새길.....
설교 시작할 때 했던 질문으로 돌아가 볼까요?
“오늘 네가 나를 모른다며 부인할 것이다. 나를 절대 알지 못한다며 잡아뗄 것이다.”
예수가 이렇게 말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내가 제자들의 자리에 서 있었다면 도망가지 않았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베드로의 자리에 서 있었다면 베드로보다 나은 행동을 했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이나 베드로처럼 실패하지 않았을까요? (......)
나는 예수 닮은 목회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 리더십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내가 보고 배운 건 '이방인의 집권자' 같은 리더십뿐이었습니다.
나는 소심하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학창 시절엔 성적이 떨어지면 쉽게 자포자기했습니다. 대학 시절 한 학기 늦게 졸업할 때도 스스로 실패자라는 의식이 컸습니다. 목회에서만큼은 인생의 실패를 만회하고 자랑스러운 목회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실패 없는 완벽을 요구하는 리더가 되어 있었습니다. 남에게 자기 실패는 드러내기 싫었습니다. 돈도 없고 교회도 내세울 게 없는 지질한 중년이었습니다.
예수는 나를 이 모습 이대로 사랑했습니다. 나를 명륜으로 불러 내 삶의 실패들을 직면하고 인정할 용기를 주었습니다. 화숙이나 재훈이 민지 재석이나 명륜의 친구들에게 있는 모습 그대로 까발리는 게 복인 줄 알고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괴로운 수고를 덜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고 전하며 큰 용기를 얻습니다.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은 예수, 나를 실패자라고 내치지 않은 예수. 고맙습니다. 내가 믿음에 실패할 때, 나를 돌이키게 하고, 내가 다른 형제를 굳게 하도록 하니 감사합니다.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으면 성공을 약속하는 책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성공하고 부자 되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복 받은 삶을 살 수 있는가를 말해주는 책 말이죠. 그러나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성경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실패에 관한 책입니다.
인간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실패로 시작됩니다. 끝까지 실낙원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비해 인간의 믿음은 보잘것없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구원에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실패할 걸 압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부실하다는 걸 압니다. 그러나 그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누가복음 22:32).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누가복음 22:6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