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내가 이래서 아프구나! 통찰을 주는 책 <의사는 수술받지 않는다>
<의사는 수술받지 않는다>, 김현정, 느리게 읽기, 2012
의사는 수술받지 않는다.
다소 도발적인 이 말은 현역 의사가 쓴 책 제목이다. 일종의 내부고발자의 목소리를 듣는 기쁨이랄까? 단숨에 읽은 책이다. 이런 류의 책 현실에서 드문 게 사실이니까. 의사 김현정은 한마디로 현명하고 균형 잡힌 의료소비를 고민하는 사람이다. 환자들의 현명한 선택이 있어야 의료계 악순환의 고리가 끊긴단다.
책은 시대 변화에 따라 달라진 의료 풍경을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간략하게나마 통시적으로 보여준다. 더하여 21세기 대한민국 의료현장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 공시적으로 꼼꼼한 관찰 기록도 빠뜨리지 않았다.
김현정은 의료의 기본이 환자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고 강하게 믿는 의사다. 그의 이름엔 늘 '세브란스가 배출한 최초의 여성 정형외과 전문의'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여성으로서는 대한민국 1호 정형외과학 대학교수다. 그는 책을 직접 쓰기만 한 게 아니라 책에 그림도 직접 그려 넣었다. 알고 보면 심각한 내용인데, 무겁지 않게 유쾌 상쾌 통쾌한 촌철살인이 담긴 의료사용 가이드다.
의사 김현정은 치열한 호기심과 끈질긴 탐구력을 지닌 학자이자 행동가로 평가된다. 서양의학 전공의로선 드물게 2007년부터 인도의 고대 의학인 아유르베다를 공부했다. 아유르베다로 그는 전인 치료에 눈을 뜨게 되고 2010년 캘리포니아 아유르베다 대학 교육전문가 인증을 취득했다. 현역 의사이면서 현대의 의료체계와 환자 모두를 날카롭고도 따뜻한 말로 '까는' 의사가 된 이면을 알 수 있다.
보통 정신과에서 마음치료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의료의 모든 분야에서 환자의 마음에 귀 기울이는 치료가 전제되어야 해요.
왜 의사는 다르게 선택하는가?
"왜 의사는 병이 걸렸을 때 일반인과 다른 의료선택을 내릴까?"
이 질문이 저자를 놓지 않는다. 현명하고 균형 잡힌 의료소비에 대해 모색해나가도록 끝까지 저자를 이끈 화두였다. 의료소비에서 의사들은 일반인들과 다른 선택을 한다. 예를 들면, 건강검진받는 비율이 낮거나, 인공관절이나 척추, 백내장, 스텐트, 임플란트 등등 그 흔한 수술받는 비율이 현저히 떨어지거나; 심지어 항암치료 참여율도 떨어진다. 요컨대 검사도 덜 받고, 수술도 덜 받고, 몸을 사린다.
“괜찮아. 그냥 지내봐. 좋아질 거야.”
의사는 수술받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마치 손님들에게는 매일 기름진 진수성찬을 차려내는 일급 요리사가 정작 자신은 풀만 먹고 산다고나 할까.
첫 번째 이유는 ‘잘 알기’ 때문이다. 의료란 양날의 칼, 현대의학의 혜택뿐 아니라 한계와 허상도 잘 알기 때문에, 웬만한 검사나 치료에 섣불리 몸을 맡기지 않는다.
두 번째 이유는 ‘기다리기’ 때문이다. 요즈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픈 것을 참지 않는다. 되도록 빨리, 가능하다면 당장 낫기를 원한다. 하지만, 근원적인 치료는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여기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걸 의사들은 안다.
세 번째 이유는 ‘자유롭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정해놓은 진료지침도 있고, 학회에서 권장하는 가이드도 있고, 병원에서 독려하는 경영방침도 있고, 보험회사에서 규정하는 수급기준도 있다. 의사들은 자기 자신이 환자가 되어서야 이런 압력에서 벗어나 가장 솔직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에 놓이게 된다.
아하! 이래서 내가 아픈 거구나! 책은 틀림없이 독자에게 이런 통찰을 줄 것이다.
좋은 책 혼자 보고 말긴 아까우니까 간략히 요약정리한다.
1. 영(0) 순위 의료 해법
의료에서, 1차든, 2차든, 3차든, 어느 의료기관을 찾아가기 전에 순서상 영 순위로 먼저 챙겨 볼 것이 있다. 바로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나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몸의 주인으로서, 내 몸에 일어나는 의료의 주체로서, 우리 자신의 차원에서 스스로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2. 신체화(somatization)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다든지 오랫동안 우울한 일들이 계속될 때 그런 정서 상태가 몸의 통증으로 전이되어 나타나게 된다. 까닭 없이 실제로 여기저기 무겁고 아프고 치료를 받아도 잘 낫지 않는다. 근골격계에서 흔히 나타난다. 아프기는 마음이 아픈데 증세는 팔다리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3. 인사이트(insight)
병식(병에 대한 인식), ‘깨달음’, ‘통찰’ 등으로 번역된다.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는 것이다. ‘아하, 그렇구나. 이래서 내가 아픈 거구나. 맞아, 맞아.’ 환자가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상태에 대한 전후 맥락을 이해하게 되면 여기에서부터 치료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하! 암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병식이지 싶다. 이전엔 부정하고 눌러둘 수 있던 의문들을 암이 다 터뜨려 줬다. 나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는 것. 이건 몸부터 시작해서 정신적 심리적 영적 정치적 사회적.... 통찰이었다. 궁금한 건 새로 알아내야 했고, 전후 맥락을 이해해야 했다. 아하!)
4. 긍정이 항상 바람직하지는 않다.
억지로 쥐어짜서 나온, 자연스럽지 않은 긍정의 과잉은 오히려 강박과 좌절과 더 큰 불안을 불러온다. 긍정의 강박이라는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우울한 일이 있다면, 잠시 실컷 우울해하고, 화가 난다면 화를 표현하는 것이 건강한 태도다. (암 종양은 잘라내고 대신 분노의 쓰나미를 선물로, 아하?)
5. 미니멀리즘 의료
의료 과잉의 배경에는 공급과잉, 공돈 주의, 근거 주의, 의사들의 성과주의와 공명심, 미디어의 비판 없는 부추김, 첨단을 찾는 환자들의 기대와 불안, 허영심 등이 복합적으로 섬세하게 얽혀서 작동하고 있다. 다다익선은, 몸을 움직이는 일이 많게, 감사하는 일이 많게, 배움이 많게, 즐겁게 까르르 웃는 일이 많게. 그러나 적을수록 좋은 건, 검사가 적게, 약이 적게, 시술이나 수술이 적게, 몸에 지방이 적게.
6. 보험을 남용하지 않는다
사보험은 불필요한 의료 수요를 창출한다. 보험에 든 사람은, 자신이 내는 보험금을 상쇄받기 위해 그다지 절실하지도 않은 검사를 받고 진단을 받고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는다. 사보험은 그 미끼를 스스로의 돈으로 마련하는 것이다. 의료를 산업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시장의 파이를 키울 수 있는 좋은 도구다. (내게 실비라든가 돈 들어간 사보험이 있었다면 나는 다른 길을 가고 있을 거 같다. 암진단비 500만 원 나온 거 말곤 의지할 보험도 돈도 없었다. 나는 이런 책을 읽는 거 말곤 길이 없었다. 아하!)
7. 지식의 민주화 시대
인터넷은 지식 세계의 판도를 바꾸었다. 어느 정도 기본 소양이 있고 의지가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필요한 정보를 찾아내고 스스로 배우고 생각하고 그리고 지식을 공유할 수 있다. 이것은 의학과 건강이라는 분야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정보와 지식은 더 이상 특정 의료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건 내 세상!)
8. 건강의 기초는 ‘체력’이다.
‘체력’이라는 기단 위에 식이, 섭생, 운동, 생활 자세, 마음가짐, 가족과 친구, 소셜 네트워크, 사회안전망, 직업적 안정감과 성취감, 등등 크고 작은 기둥들이 세워져서 ‘전인적 건강’이라는 지붕을 올린 온전한 집이 완성된다. 집을 떠받치고 있는 여러 기둥 중에서도 네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첫째 ‘마음’, 둘째는 ‘식이와 섭생’, 셋째는 ‘운동’, 넷째는 ‘환경’이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의료’라는 울타리가 있다. (암수술 후 2년 차, 책을 읽을 당시 내 몸과 체력은 내 생애 가 본 적 없는 최고의 수준으로 날로 강하고 새로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