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안산 여성노동자회 페미니즘 토론모임 ‘이프’는 우리 부부에게 새길이었어. 짝꿍의 귀가 열리는 사건이었거든. 거기서 나는 이듬해부터 토론 진행자가 되어 오늘까지 하고 있어. 가부장적인 질서를 해체한 해방구에서 남녀노소 모두 이름 부르고 평어로 토론하고 있어. 30년 만에 만난 나를 너는 이전의 선배로 대했지만 나는 이름으로 부르고 서로 평어 쓰자고 밀어붙였지. 처음에 힘들어했지만 네가 지난 1년간 평어에 익숙해지고 숙이라고 부르는 지금, 이 편지를 쓰는 내 맘이 얼마나 벅찬지 몰라. 정말 고마워 희야.
사모가 뭐죠?
우리의 새 교회 이야기도 웃으며 하자. 짝꿍이 담임하는 교회는 너도 알다시피 한때 중형 교회였는데 내적 외적 환란의 아픔을 겪고 지금은 ‘초소형’ 교회라 할 수 있어. 담임 목사가 없는 기간 짝꿍이 주일 예배 설교 목사로 오갔는데 어느 날 교회에서 우리 가족들을 보고 싶다네? 사모를 기대하면 나는 갈 맘이 없다는 데 짝꿍도 동의했어.
온 가족이 인사차 간 예배 후에 한 분이 ‘사모로서의 마음가짐’을 내게 묻는 거야. 순간 “사모가 뭐죠?” 내가 공개적으로 되물어 버렸어. 그리곤 ‘방언 터지듯’ 내 목소리를 냈어. “돕는 배필, 섬기는 여종, 그런 사모로 살아봤는데, 그건 ‘개소리’더라. 나는 예수를 새롭게 배우는 페미니스트고 416 활동가이며 글 쓰는 작가다. 교회 안은 내게 너무 좁다, 온 세상이 교회요 활동 무대다. 나를 잘 보고 청빙 여부 결정하시라.” 짝꿍은 담임으로 왔고 어느새 5년 함께하고 있어.
교회에서 나는 페미니즘 토론모임 ‘백합과 장미’를 만들었어. 한 달 한 번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을 책과 영화로 토론하는 모임이지. 내가 진행하고 목사건 성도건 교회 밖 사람이건 모두 평어로 이름 부르며 어울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길 기도하잖아? 죽어서나 가는 나라 말고 이 땅에서 경험하고 사는 하나님 나라는 어떤 모양일까? 대개는 하나님의 통치를 중심으로 말하지만, 나는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나라가 가장 쉽게 와 닿아. 어떤 차별도 배제도 없고 남녀 간 위계도 없고 모두 형제자매인 나라. 지극히 작은 이들이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받는 나라. 지금 여기에서 삶으로 살아내는 하나님 나라가 곧 페미니즘이라는 삶의 태도였어. 성경도 예수 복음도 모두 다시 해석하게 되었겠지?
더욱 크게 소리질러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마가복음 10장 48절)
올해 내 삶의 요절이야. 여리고 시각장애인 거지 비디매오 알지? 그런데 말이야 예수 복음을 우린 너무도 탈정치적으로만 배우고 해석했더구나. 거지 시각장애인이 눈뜬 사건, 이게 그냥 납작한 기적 이야기가 아니었어. 바디매오라는 사람 속엔 엄청난 정치적 함의가 있더구나. 가난, 장애, 소수자, 사회적 차별과 배제, 목소리를 잃은 사람 등등. 예수에게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치는 그를 사람들이 어떻게 대했지? 제자라는 사람들조차 시끄럽다며 조용히 하라고 억압했잖아? 지금도 사회적 약자들은 그런식으로 눌리고 밀려나고 있지.
내가 여성으로서 침묵을 강요받은 것 역시 같은 맥락이더구나. 내 입을 막는 사람들 앞에 내가 대들지 못하고 고분고분 인정받으려 애썼다는 게, 돌아볼수록 수치스러워. 그걸 겸손과 순종이고 믿음이라고? 아니었어. 누구를 위한 겸손이고 누가 요구하는 순종이었을까. 알고 보니 굴종이요, 불신앙이자 두려움이었어. 노예처럼 너무 길들어 살았더구나.
바디매오처럼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살아야 함을 알게 됐어. 나정도면 보기에 따라선 할말 다하고 산 거 같잖아? 인생은 그렇게 복잡한 거였어. 어떤 상황에선 내가 누군가를 억압하고, 또 다른 상황에선 내가 눌리고 차별받고 말이야. 난 여성이란 이유로, 차별과 억압을 ‘믿음’인 줄 알고 받아들이는 법만 배웠더구나. 이제 내가 낼 수 있는 목소리로 아이와 여성과 소수자의 목소리도 되고자 기도하게 됐어.
416합창단으로 세월호 가족의 곁에 서는 것도 같은 이유야. 대단한 작가는 못돼도 내 목소리로 말하고 글쓰고 행동하며 살고자 해. 올 초 세월호 곁에 선 예수쟁이들과 함께 《포기할 수 없는 약속》(새물결플러스, 2023)에 숟가락 하나 얹을 수 있어 감사했어.
거룩한 분노로
영화 <거룩한 분노>(페트라 볼프, 스위스, 2018)의 로라를 불러내며 마무리할게. 여성투표권을 위해 소리 지르는 로라와 여성들의 입을 막고 방해한 사람들이 누구였더라? 기독교회였잖아. 1920년대 영국의 <서프러제트>와 비교하면 50년이나 늦은 스위스의 여성참정권이었어.
그로부터 50년이 또 지난 우리 시대를 봐. 한국의 성평등은 어떨까? 영화 속 기독교회 주장은 여전히 지금 여기에 시끄럽게 들리지? 아직 ‘순종 서약’이 있고 ‘거룩한 질서’를 외치는 교회 보이지? 성 역할고정관념이 믿음으로 말해지지, 평등법을 가로막는 예수 종교, 형용모순 아니니. ‘거룩한 분노’로 싸우고 승리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내가 보고 또 보는 이유야.
사랑하는 친구야, 분노 없이 예수를 따를 수 있을까?
예수는 기존 종교 질서에 분노하며 도전하다 십자가의 길을 갔지. 꿈틀대며 목소리를 내면 네 입을 틀어막는 저항을 만날 거야. 너를 주저앉힐 이유는 많고 많으니까. 마음 아프지만 너의 지난한 싸움을 지지하며 지켜볼게. 긴 글 읽어줘서 정말 고마워. 거룩한 분노로 오늘 다시 일어서렴 친구야. 우리가 믿는 예수와 함께, 우리 손잡고 목소리를 내자꾸나. 더욱 크게 소리 질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