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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Sep 24. 2024

그래 알았어 숙, 우리 재미있게 신나게 살자

결혼 34주년 기념일에 덕이 쓴 글


    “정말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어.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내가 그렇게 열심히 떠들었는데 어떻게 한마디 반응도 없어? 변한 게 하나도 없어. 이렇게 더는 같이 살 수 없어.”

신호등 파란 불에 이화사거리를 건널 때 숙은 내 손을 뿌리치면서 소리쳤다. 그랬다. 나는 귀신에 홀린 듯 숙의 이야기에 아무런 반응도 없이 십여 분을 걸었다.     


   추석 연휴가 끝나고 맞은 토요일 오후 숙과 함께 서울에 있는 집을 나섰다. 숙은 구로에서 있는 친구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나는 기독교회관에서 있는 합창 연습을 위해서였다. 종로 5가 전철역까지 갔다가 거기서 숙은 1호선 전철을 타고 가고 나는 기독교회관으로 걸어갈 생각이었다. 집을 나서면서부터 숙은 한 주 뒤에 가는 백두산 여행과 관련하여 만주, 단둥, 나혜석 등 이런저런 얘기를 신나게 떠들었다. 나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도대체 뭐가 있었을까? 무슨 생각 하느라고 아무 반응 안 했을까? 모르겠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숙이 화를 내는데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간 여유가 있어서 종로 5가에서 동대문 방향으로 걸었다. 좋아하는 시장을 구경하면 숙의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말이다. 종로 거리에는 노점상들이 옷감 천과 곡류 등 다양한 것을 팔고 있었다. 숙은 물건을 팔고 사는 나이 든 여자들과 수다를 떨며 금방 다시 신났다. 나는 그런 숙을 막거나 방해하진 않았지만, 그 수다에 함께하지는 않았다. 숙은 어떤 여자가 파는 메밀을 먹으며 나에게도 먹으라고 한 줌을 권했다. 나는 거절했다. “아이고, 남자들은 안 먹어요.” 지켜보던 어떤 여자가 말했다. 숙이 재차 권했지만 거절했다. 숙이 생강 가루를 사서 나에게 맡기려고 했지만 나는 가방이 없다는 핑계로 그마저 거절했다.  

    

   이렇게 나는 머리와 몸이 따로 놀았다. 분명히 숙 즐겁게 해주려고 시장 쪽으로 가 놓고 정작 수다에는 끼어들지도 않았고 권하는 메밀을 먹지도 않았다. 아이고 이 바보 머저리야. 분위기를 반전시키라고 숙이 기회를 줬는데도 차버리다니. 몸 따로 머리 따로 한심한 놈아. 시간이 되어 숙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전철역으로 들어갔다. 백두산 여행 얘기도 나누고, 노점상의 신기한 상품들도 구경하고 여자들과 수다도 떨고, 메밀도 먹어보고 얼마든지 즐거운 데이트가 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참사로 끝나고 말았다. 전적으로 내 탓이었다. 무슨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이번 경우는 좀 많이 심한 경우이지만 비슷한 일이 종종 있다. 숙은 음식이나 옷이나 아이들 얘기나 영화 얘기나 일상의 크고 작은 얘기들을 나누고 싶어서 수다를 잘 떤다. 그때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숙은 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기분일 것이고 무시당하고 하찮게 여겨지는 기분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남자와 살아 말아? 이런 내 모습이 싫다. 그런데 왜 내 몸은 바로바로 반응하지 못할까? 반응해서 티키타카가 되면 우리의 결혼생활이 훨씬 더 풍성해지고 재미있을 텐데 말이다.  

    

   오늘은 34번째 결혼기념일이다. 둘의 일정이 여의치 않아 내일 안산에서 함께 축하하기로 했다. 이 글은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는 글이기도 하다. 결혼기념일 때마다 카드를 쓰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재미있게’라는 주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숙은 사람이든지 물건이든지 무엇이든지 호기심이 많고 궁금증은 참지 못하는 사람인데, 새롭고 낯선 사람과 장소와 일을 즐기는 사람인데,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나와 함께 사는 게 얼마나 재미가 없고 답답할까? 정말 많이 미안하다.  

   

   우리 때는 여자들에게 물으면 자상하고 가정적인 남자를 이상적인 남편감이라고 말하는 여자들이 많았다. 요즘 여자들은 유머 감각 있고 재미있는 남자를 이상적인 남편감이라고 말하는 여자들이 많은 것 같다. 유머 감각 있고 재미있는 남자? 그게 결혼생활에서 뭘 그리 중요하다고,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재미있는 남자가 되고 싶은 소원이 생겼다. 숙과 새로 결혼하는 기분으로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재미있는 남자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기질과 성향 자체가 그렇지 못하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는 남자인 내가 숙과 재미있게 살 수 있을까? 재미있게 노는 건 숙이 잘한다. 숙은 재미 없는 걸 못 견디는 사람이다. 재미는 숙이 전문가다. 나는 숙이 하자는 대로 하면 된다. 숙은 나를 지배하려는 마음이 없으니까 잡혀 살면 어떡하나 그런 염려할 필요도 없다. 지금까지 요리, 집안일, 페미니즘 독서 토론, 전시회 관람, 영화관람, 드라마 시청, 시민 모임, 여성 모임 등 숙과 함께한 게 참 많다. 내가 재미있는 사람은 아닌데 숙 덕분에 이만큼 재미있게 산 거다. 같이 춤추자는 것 거부한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렇다. 화숙이 하자는 대로 같이 잘 놀면 우리의 결혼생활은 재미가 보장되어 있다.   

   

   나의 사랑, 나의 소울메이트, 나의 친구 숙, 많이 고마워. 와우~ 34년 대단타. 우리 결혼 34년 축하해! 우리 재미있게 신나게 살아보자. 사랑해!   / 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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