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시간의 남태령, 세월호의 별 단원고 2학년 2반 박혜선에게
"나는 불량한 자들의 시대가 가고 인간이고 싶은 이들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나는 저들의 형식의 가벼움과 내용의 무거움을 이해하려 애썼다. 나는 저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농사를 더 열심히 짓고 싶어졌다." -강광석 님의 글 "28시간의 남태령" 중
또 한 해가 가는구나 혜선아!
해마다 이맘때면 "메리 크리스마스!"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로 인사했는데, 올핸 그럴 수가 없어. 성탄 축하나 새해 축복 대신 “탄핵”이 인사가 됐어. 12월 3일, 저 불량한 자들이 이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려던 그 밤 이후 우리에겐 일상이 없어. 무지하고 무식하고 무도한, 권력욕만 가득한 불량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발동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단다.
아~ 네게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대통령이란 작자가 내란 수괴란 말이야. 계엄군을 보내 국회를 마비시키려 했고, 선관위며 중요 인사들을 잡아 가둘 획책을 했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45년 만에 계엄 망동이라니, 참으로 불량한 인간이지. 국회의 계엄 해제 가결로 2시간 만에 끝났지만, 아직 여긴 내란 상태란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니 혜선아!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노동한 몸들이 자려던 밤 10시 23분경에 계엄 선언이 말이 되니? 술 처먹고 배가 처불러서 고달픈 사람들의 일상을 1도 생각 안 하지. '종북과 반국가세력을 척결하고 자유대한민국 수호'라는 개소리 명분이 어처구니가 없어. 포고문 좀 봐. ① 국회 및 정당의 정치활동 일체 금지, ② 모든 언론과 출판의 자유 통제, ③ 전공의 및 의료인 불복종 시 처단, ④ 재판 절차나 영장 없는 일방적인 체포, 구금, 압수수색. 독재시대로 가겠대.
이야기는 지금부터야 혜선아. 그날 밤부터 분노한 시민들은 바로 광장으로 나나고 있어. 국회 앞으로 광화문으로 헌법재판소 앞으로. 평일에도 주말에도 쉴 수가 없어. "윤석열을 탄핵하라!"로 시작해서 "윤석열을 체포하라!" "윤석열을 구속하라!"14일에 윤석열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됐지만 내란 수괴는 거짓말과 꼼수로 버티고 있어. 29일엔 무안 공항 항공에서 179명이 사망하는 항공기 참사가 났으니 엎친 데 덮친 슬픔과 혼란이구나.
하늘을 바라보며 부른다 혜선아!
엄마는 하늘을 쳐다볼 때마다 네가 엄마를 보고 있다고 하셨지? 나도 그런 맘으로 하늘을 보는구나. 이 불량한 사람들의 시대에 12월 한 달간 집회에 갈 때마다 새로운 하늘을 보았어. 바로 2030여성들이었어. 집회 군중의 압도적 다수도 무대에서 발언하는 사람도 대부분 여성청년들이었어. 손에 손에 응원봉을 들고 노래하고 춤추는 이들. 아~ 세상이 변하고 있구나, 새로운 시대로구나, 이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구나, 확인할 수 있었어.
이들은 전국농민회(전농) 소속 농부들이 트랙터와 함께 상경투쟁 길에 남태령에서 경찰에 가로막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남태령으로 달려왔어. 농사와도 전농과도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보이는 젊은이들이 3만 명이나 모여들었어. "차 빼라!" "방 빼라!" 겨울밤을 새워 응원봉을 흔들려 '다시 만날 세계' 노래하고 춤추고 발언을 이어갔어. 거기 못간 시민들은 먹을 것 마실 것, 핫팩에 난방 버스에 의료진까지 보냈어. 결국 경찰 차벽이 뚫렸고 농민들은 트랙터 10대를 몰고 서울로 진입했으니, 과연 '남태령 대첩'이라 할만하지?
그 밤에 대해 전남 강진군 농민회 사무국장 강광석씨가 SNS에 "28시간의 남태령"이란 감동적인 글을 썼더구나. 너무 감동적이라 마지막 대목이라도 인용하며 편지를 시작했어. "불량한 자들의 시대가 가고 인간이고 싶은 이들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맞아. 불량한 자들을 2030 청년여성들은 더이상 견디지 않겠다는구나.
사랑스러운 혜선아!
거기선 하느님과 성모님과 더 가깝게, 좋은 사람들과 네가 하고 싶을 일 맘껏 하며 살고 있지? 엄마한테 삐질 일도 상처 주는 말 할 일도 없겠지? 2012년 12월 21일 금요일에 남산 '사랑의 열쇠 탑'에 가서 "해서니와 나들이"라 쓴 자물쇠, 그리고 엄마 혼자 가셔서 "우리는 네 식구다"라고 쓴 자물쇠를 기억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많이 나빠 라식도 라섹도 할 상태가 아니었던 혜선아! 엄마는 세월호에서 눈 나쁜 네가 안경을 잃고 길을 못 찾을까 봐 많이 걱정하셨지. 일상에서 엄마와 언니 도움을 많이 받아서 18살이 되도록 가스불도 못 켜는 '아기' 혜선이였지. 나도 노안에다 망막 박리 수술까지 받아서 혜선이의 불편에 무지 공감해.
그래서 이쁜 아기 혜선이를 생각하며 하늘나라를 그려본단다. 그곳에선 이 땅에서 우리가 겪는 질병과 고통이 없지? 거기서도 눈이 나쁘고 장애가 있다면 그게 무슨 하늘나라겠니? 거기서도 엄마는 네 밥을 걱정해야 한다면, 요리 잘하는 친구한테 혜선이 밥 부탁해야 한다면, 그건 하늘나라가 아닐 거야. 이 땅에 만연한 차별도 혐오도 배제도 없고, 물이 무서울 일도 없고, 햇빛처럼 빛나는 꿈을 따라 살고 있을 거야, 그치?
보고 싶구나 혜선아!
'남태령에서 28시간' 글의 결말 부분을 옮기며 마무리할게. 크리스마스 저녁 서울 세월호 기억관 앞 416기억식에서 낭독된 부분이지.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세월호 아이들을 보았다." 그래, 우리 모두 너희들을 보았지. 불량한 자들의 시대를 뒤로하고 인간이고 싶은 이들의 시대를 열어가는 너희들을. 고맙구나. 틀림없이 세상을 바꾸는 방송작가요, 깨어있는 국어 선생님으로 지금 여기서 함께 하고 있을 혜선아. 미안하고 많이 보고 싶구나. 사랑해.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세월호 아이들을 보았다. 세월호 아이들이 그 자리에 왔다고 굳게 믿었다. 죽은 자가 산자의 길을 열었다고 믿었다. 하늘의 별이 된 그들의 영혼이, 배에 남긴 마지막 손톱자국이, 그들의 호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지상에 내려와 응원봉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세월호 이전의 세상과 이후의 세상은 달라야 한다는 다짐들이 저들의 가슴속에서 분노의 꽃을 피웠다고 생각했다. 찬 바다에서 죽은 사람도 있는데 이깟 겨울 하룻밤이 무슨 대수냐며, 그들은 인류의 역사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인간과 아름답기 그지없는 인간의 투쟁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나는 22일 일요일 새벽 4시 남태령에서 여명을 보았고 승리를 확신했고 세월호의 부활을 보았다. 그 후로부터는 경찰벽을 넘는 것도, 한강을 넘은 것도, 윤석열 자리의 턱밑까지 압박한 것도 이미 되어질 길이었다.
체면과 양심이 대열을 분산의 길에서 구했고 연민과 분노가 트랙터의 길을 열었다. 나는 불량한 자들의 시대가 가고 인간이고 싶은 이들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나는 저들의 형식의 가벼움과 내용의 무거움을 이해하려 애썼다. 나는 저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농사를 더 열심히 짓고 싶어졌다.
(세월호로 별이 된 단원고 2학년 2반 박혜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