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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사진을 선택했다."

퓰리처상 수상작 사진 전시회를 보고

by 꿀벌 김화숙

나는 중년이 돼서야 사진과 가까워진 사람이다. 스마트폰 덕분이겠다. 내가 어릴 땐 어지간히 있는 집 아이들 외엔 예쁜 옷 입고 사진 찍을 일이 없었다. 학창 시절 사진은 주로 소풍 수학여행 입학식 졸업식에 찍은 것들이다. 결혼 후 아이들이 나면서 카메라를 처음 샀고 스마트폰을 쓰면서 점점 사진이 일상에 들어왔다.


스마트폰과 함께 사진 실력이 늘었을까? 그러면 얼마나 좋으랴만, 사진은 어려운 예술이었다. 기본 구도를 잘 잡기도 쉽지 않거니와 찍는 게 다가 아니었다. 글쓰기가 그러하듯이. 어쩌나 자꾸 무언가를 찍고 싶다는 거다. 사진으로 뭘 말하고 싶은진 모르겠는데 말이다. 퓰리쳐 수상작처럼 말을 하는 사진을 찍고 싶었을까.


글을 쓰며 필설의 한계를 절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왜, 무얼 어떻게 쓰고 싶은지 단번에 알까? 퓰리처상 수상작 사진전을 보는 내내 혼자 물었다. 무엇을 어떻게 포착하고 쓰고 싶은지.


1917년에 창설된 퓰리처상(The Pulitzer Prize)은 언론인 조지프 퓰리처(1847∼1911)의 이름을 딴 상이다. 그가 ‘공공봉사, 공공윤리, 미국문학, 교육진흥을 장려하는 상’을 만드는 데 써 달라며 컬럼비아 대학에 기탁한 기부금이 상의 시작이었다. 퓰리처상 선정 위원회는 매년 언론 분야 14개를 포함, 총 21개 부문의 수상자를 선정하고 있다.


올해 전시회는 1940년대부터 지금까지 80년간의 수상작을 보는 기회였다. 세계 현대사를 2차 세계대전부터 10년 단위로 현재까지 망라해 주는 수업이었달까. 전쟁, 기아, 지진, 홍수, 내전, 화재, 난민, 정치, 스포츠... 퓰리쳐상 수상작 사진의 시선을 볼 수 있었다. 폭탄 터지는 전장 보단 전쟁을 겪는 사람들에게로, 가려진 이야기로 향해 있었다. 이유를 모르고 고통받는, 죄없이 죽는 사람들.....


사진 앞에서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을 줄줄 흘린 건 처음이었다. 영화도 아니고 인물이 직접 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사진의 힘 그거였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3월말까지.



"나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사진을 선택했다."

"사진기자란 목숨을 걸고 오지로 떠나는 선교사와 같다."

“망설일 수 없다. 그 순간이 사진 속 모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진을 찍는다.”


퓰리처상을 네 번이나 수상한 사진 기자 캐롤 구지 (Carol Guzy 1956~)가 한 말이다. 전쟁과 지진과 화산 등 험한 역사의 현장에 여성 사진가가 있었다. 남성만 할 거라는 편견을 깨고 종군기자로 목숨 걸고 사진을 찍고 기록하는 여성들이 있었다. 세상의 절반이 여성인데, 그런 여성 사진 기자에 나는 왜 놀라는가. 1999년 코소보 사태 때 캐롤 구지가 퓰리쳐상을 수상한 사진을 지나칠 수가 없었다.


철조망 밖 조부모에게로 건네진 두 살 난 아킴 샬라는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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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엄마!


엄마 보낸 후에 옛날 사진을 찾아보게 됐어. 퓰리처상 사진 전시회를 보고 나니 사진으로 이야기하고 싶어졌어. 내 책상 앞에 새로 꽂아 두고 보는 사진이 뭔지 알지? 그 사진으로 이야기할게.


내 결혼식 날 신부대기실에서 나랑 엄마랑 아빠 셋이서 찍은 사진 말이야. 1990년 9월 24일, 내 나이 스물여덟, 엄마는 55세 아빠는 60세였어. 스물여덟 살 신부도 어리고 고운 얼굴이지만 엄마도 아빠도 너무너무 젊은 모습인 거 알아 엄마? 돌아가실 때 엄마 모습과 비교하니 정말 세월이 야속하다 엄마.


긴장해서 잘 웃지도 못하던 날 보러, 아빠와 엄마가 신부 대기실에 들어왔지. 면사포 쓰고 드레스 입고 손에는 백합 부케를 든 신부와 양복 정장한 아빠 그리고 분홍 한복 입은 엄마. 이렇게 셋이 찍은 유일한 사진이야. "오늘은 당신의 남은 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다." 그 말이 와락 이해되는 거 있지. 엄마 떠나기 얼마 전엔 내 나이도 막 헷갈려 했잖아. 62세 이 딸 보다 저 때 엄빠가 더 젊었다는 게 실감나?


엷은 미소 짓고 앉은 두 분 얼굴 좀 봐. 시집 안 갈 줄 알았던 딸년을 드디어 치우니 좋았어? 참 세상 모르고 결혼을 한다고 덤볐던 이 딸을 보낼 때 마음이 어땠어? 숱 많고 까만 엄마의 머리카락이 낯설다. 엄만 여든이 넘도록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으로 살다 돌아가시기 전 한 두해만 흰머리였잖아. 내가 집에 가면 늘 엄마 잔소리를 들어야 했지. 50대의 딸년은 회색 자연머리카락이고 여든 노모는 까만 염색 머리였으니까.


"젊은 사람이 염색 좀 하고 그래라. 화장도 안 해 염색도 안 해, 추레한 아줌마라고 사람들이 무시한다."

엄마 지청구에 내가 들은 척도 안 하다가 결국 들이받았겠지.

"내가 염색을 안 하든 하든 남이 무슨 상관이래? 나이 먹고 머리 하얘지는 게 흉이야? 남의 눈에 좋자고 몸에 안 좋고 눈에 안 좋은 염색에 왜 돈을 써? 나 건강하게 살고 싶으니 제발 그냥 좀 둬."

"야가 세상모르는 소리 하고 있다. 요샌 좋은 염색약 많단다. 촌 할마이들 염색 안 사람 있나 봐라. 혼자만 허옇게 댕기면 더 늙고 없어 보여 안 된다."


엄마는 내가 남 눈에 없어 보이는 게 그렇게 걱정됐어? 남하듯 하고 살라고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가르쳤건만 엄마 자식들 중에 제대로 남 좋도록 애쓰며 사는 인간이 없어 보이네, 어쩌지? 엄마 외롭고 섭섭했어?

"그곳 풍습을 알면 진장구를 지고 다니라 했다. 니도 제발 사람들 하는 거 봐 가며 해라."

"집안에서 욕먹고 크는 자식은 밖에 나가면 칭찬받는다."

"여자는 시집가면 시집 풍습이 법이다. 본데 있어야 친정 욕 안 먹인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하던 엄마 잔소리 들려? 시효를 다한 말들 같지 않아?

엄마 가르침 따르려고 나도 나름 애쓰는 척 하던 건 기억하지? 내가 어디 엄마한테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애였어? 그러나 그렇게 잡아 키운다고 사람 성정이 죽여지는 게 아니더라 엄마. 결국 지멋대로 살게 된 이 딸 봤지? 남 눈에 드는 삶이란 부질없더란 거 이젠 인정하지 엄마?


인생 덧없다 엄마. 무슨 영화를 보자고 자식들한테 그렇게나 엄하게 해댔을까. 나도 엄마한테 배운대로 애들 엄하게 한다고 했는데, 하다보니 부질없더라. 짧은 인생, 자기 뜻대로 좀 살다 가야하지 않겠어? 이제라도 엄마, 나는 내 딸하고 친구처럼 살아 보려 노력하고 있어. 고분고분하길 요구하지도 요구받지도 않을 거야. 그리고 질문하며 살 거야.


왜?

꼭 그래야 해?

누구 좋으라고?

뭘 보여주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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