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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3/1 3060모녀 유산탕진 호주여행을 앞두고

엄마가 남겨 준 돈으로 딸과 시드니 브리즈번 여행을 하는 거야

by 꿀벌 김화숙

사랑하는 엄마!


오늘이 엄마 떠난 지 '107일'이라고 내 전화기가 알려주네. 세월 참 빠르지?

엄마한테 고백할 게 있어서 편지를 쓴다. 엄마 딸이 어마어마한 일을 저질렀거든.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엄마? 엄마 생전에 내가 꿈꾸던 모녀 3대 여행 하루 전날이야. 맞아. 내 평생에 특별한 여행이야.


엄마 고마워. 엄마 덕분에 저지르는 일이야. 모녀가 맨날 광장에 나가 떨어야 하는 한국을 떠나 따뜻한 여름 남반구 호주로 떠나려 해. 그것도 2주씩이나, 여행으로는 평생 이 정도 길게 떠나 본 적이 없었어. 이 내란과 집회의 시국에 룰루랄라 놀러 가다니, 설마 꿈 아니겠지? 내가 미쳤나봐 엄마. 저질러 버렸어.


며칠 전엔 반바지랑 여름 옷도 샀어. 여행짐을 싸 보니 운동복 말곤 괜찮은 반바지가 없더란 말이야. 다행히 단골 옷집에 반바지가 있었어. "겨울에 여름 나라로 여행가는 손님 한 두 분이 꼭 찾더라고요."라며 사장님이 신이 난 얼굴로 옷을 내놓지 뭐야. 알고 보니 여행자들을 생각해서 반바지는 사계절 상품으로 판대.


반바지 패션쇼를 하는데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거 있지.


"아이고 야가 간이 배밖에 나온 년 맞네 맞아. 모녀가 그렇게 길게 집을 비우고 간다꼬? 정서방은 우예고? 뭐라 안 하더나? 교회는? 사모가 목사 혼자 두고 싸돌아다니느라 예배 빠지모 사람들 흉본대이. 잠깐도 아니고 세상에. 참 나, 그래도 여름 나라라 안 춥다니 그건 좋겠네...."


맞아 엄마. 내 간이 배밖에 나간 지 10년이 더 넘었잖아. 날 단속하던 엄마가 결국 맘을 바꿔 내 편이 된 세월도 그정도 됐지? 남의 눈에 흉 될까, 교회에 흉 될까, 그 듣기 싫던 소릴 엄마가 또 할리가 없는데도 마구 귀에 들리는 건 뭐지? 나도 고민했다는 뜻이야. 너무나 오래된 소원이라고 강조하는 거야. 재고 또 재 봐도 가고 싶은 걸 어쩌냐구! 엄만 결국, 니가 맞다, 니 뜻대로 살아라, 응원하고 돌아가셨으니, 이해하지?


"3060모녀 유산탕진 해외여행"

여행 제목 어때 엄마? 엄만 어디다 방점을 찍고 싶어? 다 특별하지. 3060도 모녀도 멋진데, 이번엔 '유산탕진'에 꽂혀. 살다 보니 이 정도 규모의 돈을 쓰며 자유롭게 여행한 적이 없었잖아? 돈이 어디서 났냐고? 우리 논 있잖아. 아빠 돌아가신 후 엄마가 농지연금 빼서 생활비 쓴 그 논. 그걸 엄마 아들이 모기지 정산하고 상속했어. 대신 세 딸은 현금을 조금씩 받은 거야. 엄마 떠난 지 100일 무렵 내 통장에 1,200만 원이 들어왔지. 엄마아빠에게 받은 현금 유산이 말이야.


이 역사적인 돈을 어떻게 쓰면 좋을까? 근데 참 돈 쓸 데 많이 떠오르더라.


우선 전세금. 7,000만 원에 40만 원 월세로 20년 가까이 사는 이 집, 옮길 때가 됐거든. 월세 부담 되니까. 엄마 유산으론 월세 없는 전세 얻을 가능성을 생각해 봤어. 아, 가능성 제로! 그러니 패스! 20년 넘은 정서방 똥차가 이번 종합검사 통과 못했어. 딱 중고차 한 대 살 돈이지? 아님 곧 장가갈 우리 막내에게 힘을 보태 줘? 우리 딸 혹시 또 수험생 되면 매달 용돈 보태줘? 어디다 투자해서 돈 좀 확 불리는 방법 없나?....


그런데 엄마, 나 미쳤나봐. 그 모든 필요보다 더 간절히 하고 싶은 게 있었어. 이름하여 '유산탕진 모녀여행'이었어. 시험 끝난 엄마 손녀 모야랑 나, 언제 또 이런 시간이 나겠어? 몸은 둘이지만 마음은 엄마까지 모녀 3대 여행이라고 이름을 붙이면서 말이지. 나는 엄마 생전에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제주도도 못 데려간 못난 딸.몇 년 전 제주도 가기로 다 짰다가 엄마가 체력적으로 감당할 자신이 없다며 엎었잖아.


엄마는 떠났고 이제 나는 내일이면 엄마 유산을 홀랑 쓰는 해외여행을 떠나. 3060 모녀 유산탕진 호주여행. 시드니 7박 8일 브리즈번 4박 5일. 1,200만 원 중 300만 원은 정서방 똥차 바꿀 때 보태라고 인심썼어. 너무나 소박한 중고차엔 쓸모가 된다 믿기로 했어. 100만 원은 엄마 맘에 이입해, 엄마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뜻으로 가난한 교회에 냈어. 남은 800만 원은 항공 숙박 여행준비 및 경비가 되는 거야.


꼴랑 8백만원으로 거창한 여행을 하는 건 브리즈번에 친구가 있어서야. 시드니에서 호텔에 묵으며 놀고 먹다 브리즈번까지 또 비행기 타고 가면 주머니가 가벼워져 있을 거야 그치? 숙박을 제공하는 친구를 믿고 나서기로 했어. 인생은 살만하고 재미있어 엄마. 이 나이 되도록 지지리도 돈 없는 인생이다 싶을 땐 부끄럽다가도 때때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복을 셀 때마다 나는 부러울 것 없는 부자가 돼.


사랑하는 엄마!


유산탕진 여행이니만큼 아낌없이 잘 쓰고 즐기고 올 계획이야. 내일 저녁이면 우리 모녀 3대는 비행기 타고 날고 있을 거야. 엄마는 내 가슴에 있고 사진으로도 함께 가는 거야. 엄마, 우리 즐겁게 놀고 오자 응? 내가 엄마 생전에 못 해 본 걸 내 딸과는 할 수 있어서, 또 모녀3대 같이 떠날 수 있어서 너무 좋아. 매일 모녀유랑기 글쓰기 할 수 있어서 더 즐거운 여행이 될 거야. 우린 최강 모녀 3대란 거 알지?


엄마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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