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말고 황금숙

친구 범수가 가져다준 호박으로 호박죽을 쑤며

by 꿀벌 김화숙

260116. 금. 6/-1


늙은 호박

민현숙


펑퍼짐한 엉덩이

땅바닥에 내려놓고

가을볕을 쬐는

늙은 호박


이름 부르기 좋아

늙은 호박이라지만

실은 씨앗 아기

잔뜩 품고 있는 새댁이다


이제나저제나

반으로 쩍 갈라져

품고 있던 씨앗 아기

와락 쏟아 내고 싶은

뚱뚱보 엄마다.




잘 익어서 씨앗을 가득 품고 있는 노란 호박을 왜 '늙은 호박'이라 하는지 모르겠다. 이름 부르기 좋아 늙은 호박이지, 어딜 봐서 늙었다는 건지, 설사 늙었다 한들 굳이 늙은 늙은 불러야 할까? 늙은 여자, 늙은 화숙, 누가 그렇게 부르냐고. 다르게 이름해 볼 일이로다.


식물에서 씨앗이 영글었으면 성숙한 거지 늙은 게 아니다. 잘 익은 사과, 잘 익은 감, 잘 영근 포도, 잘 영근 벼, 잘 여문 호두. 그럼 잘 익은 호박. 더구나 씨앗을 가득 품고 있다는 건 재생산 능력이고, 그건 늙음이 아닌 젊음이다. 씨앗 아기 가득 품은 성숙한 여성 호박, 젊은 엄마 호박 맞다.


내 맘대로 늙은 호박 대신 새 이름을 지어 부르기로 한다. 이 아름답고 탐스런 열매에 잘 어울리는 이름을 생각한다. 누렇고 크고 둥글고 달고 씨앗 가득하고 영양 많은 호박. 음... 황숙 호박 어떨까? 또는 금숙 호박. 혹은 황금숙 호박. 누렇게 황금빛으로 잘 익었으니까. 김화숙이랑 자매 황금숙?숙이 친구라 하자. 좋았어 황금숙 호박이다.


친구 범수가 농구공만 한 황금숙 호박 한 덩이 갖다 주고 갔다. 시골 아버님이 농사지은 건데 내게로 하나가 왔다. 커서 차로 실어와서는 4층까지 직접 배달해 줄 수밖에 없었다. 이 귀한 선물을 어찌 나 혼자 먹으랴. 오늘 저녁 마침 진보당 운영위원회 회의가 있으니, 그때 내가 호박죽을 쒀 가기로 했다. 낮에 껍질 벗기고 총총 썰어 푹 익혀뒀다. 좀 있다가 죽을 쒀서 따뜻하게 가져갈 생각이다.


이제나저제나

반으로 쩍 갈라져

품고 있던 씨앗 아기

와락 쏟아 내고 싶은

뚱뚱보 엄마다.


반으로 쩍 갈라 씨앗 아기들을 싹 골라냈다. 잠시 생각했다. 씨를 보관할까 버릴까. 오늘은 챙겨놓지 않았다. 그런데 황금숙 호박에 관한 시를 읽고 보니 내 맘이 달라진다. 예전엔 호박씨를 참 열심히 말리고 까먹었더랬는데, 미련 없이 쓰레기 취급했구나 깨닫는다. 호박 엄마 생각하니, 내가 씨앗을 까먹지 않더라도 잘 말려서 내년에 다시 싹 틔우게 남겨뒀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호박 과육을 삶으며 맛보니 달더라, 거기 생각이 미쳤다. 이 달고 귀한 황금숙 호박씨, 후다닥 마음을 돌려 먹었다. 음식 쓰레기 봉지에서 껍질 조각들 사이에서 호박씨만 골라 작은 소쿠리에 헹궈 널어두었다. 반으로 쩍 갈라져 씨앗 아기 와락 쏟아 내고 싶었을 황금숙 호박 엄마. 좋다. 황금숙 씨앗은 내면 봄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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