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 바깥의 경계는 과연 있는 걸까?
260325. 수. 맑음. 16/3
집필 동안거(冬安居) 끝낸다고 머리카락 가지고 쌩쑈, 즐거운 경험이 이어지고 있다. 머리 색깔 하나 바꾼 건데, 보라색이 주는 자유랄까 환상의 맛이 장난 아니다. 거기다 드디어 원고 넘기곤 달려가 뽀글뽀글 볶아버렸더니, 이건 또 다른 판타지다. 뭐랄까, 또 하나의 경계를 폴짝 넘어버린 맛이랄까. 제멋대로 머리가 봉두난발 하늘로 뽀글거리며 날아가는 기분. 남모르는 희열로 춤추며 돌아다니는 며칠이었다.
머리카락이 늘 같은 색으로 같은 모양으로 가지런하게 정리돼 있으라는 법 있어? 머리카락이란 자라고 빠지고 새로 나는 것. 왜 그러겠어? 지멋대로 바꿔 보라는 선물인 겨. 내가 고관대작도 아니고 틀에 박혀 살아야 하는 신분있는 마나님도 아니고, 어쩔? 오늘도 지속협 회의 가서 사람들과 박장대소 파안대소 머리 때문에 웃고 떠들 수 있었다. 봄맞이 축제다. 혼자 난리부르스를 추는 봄맞이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딸이 보라색 파마머리 엄마를 폰 앱으로 찍어 분장하는 장난을 해 놓았다. 요상하게 화장한 얼굴이 나름 눈부시고 개성 만점인 게, 혼자 보기 아까워 썸네일로 올려버린다. 푹 꺼지고 얇은 눈꺼풀의 꽤죄죄하던 맨얼굴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아이라인을 두껍게 그려 눈꼬리 쪽이 올라가니 똑똑한 팜므파탈 같다.(어데! 아직 순해보여!) 금빛펄 아이섀도에 한쪽 콧구멍에 꿰인 금빛 코걸이는 또 어떤가. 사람이 이래서 화장을 하고 악세서리를 하고 성형을 하는 걸 알겠다.
그나저나 나란 사람의 경계는 어디 있을까? 저 얼굴에서 나와 나 바깥의 경계를 나눌 수 있나? 거봐라. 경계짓기란 애당초 얼마나 모호하고 실체가 없는 짓인가. 저기서 아이섀도와 아이라인 코걸이 빼면 원래 나라고? 보라색 머리카락을 희게 되돌리면 그게 나라고? 내가 원래 흰머리던가? 뽀글이 파마랑 반곱슬은 도대체 나를 어떻게 다르게 하지? 코걸이 몇 개 더 걸고 있으면 나 아닐 이유는 뭐지?
미용실에서 머리할 때 원장님한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고3 여학생이 히피펌 긴 머리 파마를 풀러 왔더란다. 어인 일인가 물었더니, 너무너무 머리를 바꿔 보고 싶어서 파마를 했는데, 학교에서 풀고 오라고 했다나. 엄마가 허략해서 한 파마였는데 이젠 엄마와 함께 다른 미용실 와서 쫙쫙 펴는 거란다. 15만에 긴 파마를 펴고 끝만 살짝 꼬부려 줬다나 어쨌다나. 고3 교실에서 히피펌이라니, 나머지 아이들이 다 하고 싶어할 텐데, 공부에 방해된다는 이유였다나 뭐라나.
"아니, 요즘 중고생 두발 자유 아니던가요? 그 비싼 파마를 하고 바로 풀어야 했다고요?"
내가 당한 일인양 화들짝 흥분했더니 미용실 원장님 아주 정색을 하며 설명했다.
"아니죠. 두발 길이야 예전보다는 자유인데 파마나 염색은 안 그래요. 티 안 날 정도만 허락되나 봐요. 히피펌 해보셨잖아요. 그건 안 되죠."
왜? 하나마나한 질문을 해대는 나. 도대체 해 보고 싶어 한 머리를 학교는 강제로 다시 펴게 하는구나 아직도. 학교를 따르는 것 말곤 선택지가 없었을 소녀를 생각하니, 내가 다 가슴이 답답했다.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차이죠? 요즘 애들 다 스트레이트 파마하고 다니잖아요. 쫙쫙 펴는 파마는 되고 꼬부리는 파마는 안 돼요? 너무 웃긴다."
미용사가 답할 문제는 아니었지만, 물으나마나 한 질문이 내 입에서 계속 터져나왔다.
난들 십 대에 머리 맘대로 볶아보는 자유를 꿈이나 꾸었으랴. 중학교 3년은 오직 단발. 고1땐 단발, 고2땐 양갈래 묶음, 고3땐 양갈래 땋은 머리. 지금 돌아보면 참 말도 안 되는 시절이었다. 그런 통제하에 몰개성으로 자랐으니 나이 스물이 돼도 자기란 게 있었으면 이상한 일이겠다. 나한테 어울리는 머리가 뭔지 옷을 어떻게 고를지,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어떤 분위기일 때 기분이 좋은지, 알 턱이 없었다.
어려서 좀 더 실험하며 제 멋을 찾아 봤어야 말이지. 눌러놨던 내 본능이 이 나이에 반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위풍당당, 내 꼴리흔대로 살고 싶다지만, 기껏 요정도 가지고... 씁쓸하다.
그나저나, 나와 나 바깥의 경계는 과연 있는 걸까? 저 썸네일에서 나와 나 아닌 것을 어떻게 구별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