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냐, 난 괜찮아. 쓰던 거 써도 돼."

듀오백 인생 의자 언박싱, 두 사람이 함께 산다는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by 꿀벌 김화숙


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 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내 생애 처음으로 내 의자를 샀다. 내 생애까지 끌어온 건 너무 거창한 시작인가? 사실이니까. 내 돈 주고 내가 앉을 의자를 새 걸로 산 적 있던가? 떠올려보려 애써도 그런 경험이 없었다. 한국에서든 해외에서든 가구를 주워 쓰거나 재활용 가게에서 사 쓴 게 많아서 말이다. (아, TMI인가?) 이 역사적인 주문은 직장인 딸이 대행해 줬다. 딸이 이용하는 인터넷 몰에서, 자기가 샀던 같은 종류의 의자로 골라 줬다. 내 거는 녹색, 짝꿍 거는 검은색. 각자의 책상과 잘 어울리는 색이라 맘에 든다.



의자 하나에 20만 원을 쓰자니, 소심한 지갑이 참 오래도 망설였더랬다. 큰 지출이니 그만한 의미를 붙이고 싶었다. 그래, 다가오는 생일 선물이라 하자. 아니 인생 의자라는데, 뭔들 어떤가. 글쓰기로 의자에 앉는 시간이 많다 보니 점점 의자의 중요성을 느낀 탓이라고 하자. 혹은, <의자>라는 시를 좋아해서 충동적으로 의자를 사고 싶었다면 어때. 그래, 마지막 것이 가장 맞는 말 같은 걸? 내가 사고 싶어서, 듀오백이라서 듀오로 질.렀.다. 새 의자의 이름을 불러 주자면 국산 듀오백 듀오플렉스 리마 의자란다.




"아냐, 난 괜찮아. 쓰던 거 써도 돼....."


새 의자 두 개 주문하던 날 짝꿍이 한 말이었다. 어이구~~ 그의 의견을 존중하지만, 나는 단칼에 무시할 수 있었다. 무시하는 게 존중이고 사랑인 상황도 있으니까. 내가 인생의자 타령했지만 그를 위해서도 새 의자를 사 주고 싶은 게 내 맘이었다. 그 역시 늘 책상 앞에 앉는 생활이건만, 새 의자를 가져 본 적 없긴 마찬가지였다. 그걸 우리가 한 번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을 뿐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앉은 의자를 들자면 수도 없이 많았다. 애들 쓰던 십 수년 된 듀오백 학생 의자가 그의 요즘 의자였다. '괜찮아' 하는 그에 비해 나는 집에 있는 의자들로 '돌려 막기'로 앉을 때마다 새 의자를 생각하곤 했더랬다.



"괜찮아" 때문에 그는 '괜찮은 남편' 몇 프로 안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좀 심하게 말하자. 그는 자기 욕망이 '거세된' 사람이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자기 맘대로 학과를 선택한 건 '반항'이었다. 그러나 성인이 된 후는 교회 리더와 '하나님의 뜻' 아래 '나는 괜찮아'로 살았다. 결혼 후엔 가족들을 위한 게 곧 그의 삶이었다. 다들 그를 '괜찮은' 사람이라 했다. 그러나 괜찮은 껍데기는 참 약했다. 어느 날 쓰나미가 덮쳤을 때, 싹 쓸려가는 거였다. 결혼생활 30년이 지나며, '괜찮아'는 내가 의심하며 듣는 말이다.




아! 뭐든 껍데기를 벗겨버리는 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이런 기분으로 사람들이 물건 사고 언박싱 사진을 찍고 포스팅하는지도 모르겠다. 박스를 뜯는 기분. 씌워놓은 비닐 껍데기를 벗기고 새 물건을 만지는 기쁨. 껍데기가 괜찮아 보인다고 그대로 쓰는 사람 있을까? 그럴 순 없겠다. 솔직하자. 나는 언박싱을 지켜봤다. 자잘한 껍데기를 벗기고 확인하고 조립하는 건 모두 딸이 했다. 딸의 작은 손끝에서 의자가 되어 가는 과정을 나는 지켜보며 사진 찍고 놀았다. 껍데기란 아주 잠시 필요한 것이로구나. 맞다, 껍데기란 그런 것이었다.



내게 감동은 의자 껍데기가 벗겨지는 것만이 아니었다. 조립하는 딸이 있었다.


컴퓨터든 기계든 고치고 조립하는 걸 즐기는 딸이다. 자동차 운전을 아주 즐기는 딸이다. 나와 참 다르게 자랐으니 다르게 살 것이다. 레고를 많이 조립하고 놀며 커서 그런가? 아빠와 오빠와 운동하며 커서 그런가? 여자는 기계를 못 만지네, 여자는 운전을 못하네, 그건 모두 개 짖는 헛소리인 걸 우리 딸이 보여주고 있었다. 성별 이분법, 성별 노동 분업, 그거야말로 버려질 껍데기였다. 나는 그런 껍데기를 알맹이로 착각했더랬다. 거기 맞게 '괜찮은 여자 노릇' 해보느라 너무 긴 세월을 허비했다. 그런 껍데기에 더 이상 갇히지 않는 딸이 보기 좋아서 나는 언박싱 글까지 쓰고 있나 보다.




새 의자에 처음으로 앉아 봤다. 다섯 개의 바퀴가 안정감을 주면서도 자유롭게 움직였다. 안장 아래 오른쪽 손잡이는 높이 조절용, 왼쪽 것은 등받이 각도 조절용. 내 마음에 들었다. 가끔씩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떨어뜨리고 졸고 있는 우리를 서로 바라볼 때가 있었다. 참 없어 보였지. 맞아, 없는 사람임을 확인하는 그림이었다. 이게 싫어 나는 졸린다 싶으면 자리에 누워 자는 쪽이었다. 그러나 짝꿍은 깨기 힘들다고 꾸역꾸역 앉아서 조는 사람. 이제 그 모습 더 이상 안 볼 수 있어 좋다. 웃음이 실실 나왔다. 당당하게, 편안하게, 느긋하게, 등을 젖히고 고개를 목받이에 받치고 졸 수 있는 거다. 음악을 들으며 뽀대나게 쉴 수도 있겠다.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싸우지 말고 살아라" 이정록 시인의 시 <의자>를 좋아하지만 마지막 연이 늘 아쉬웠다. 자꾸 말을 거는 옥에 티였다. 안 싸우면 가장 좋은 부부 사이인가요? 어머니 세대의 목소리임을 감안하고 읽어도 불편했다. 과연 안 싸우고 살면 잘 사는 건가요?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30주년 지나 보니 조금 알겠다. 진정 서로에게 의자를 내주는 동반자, 필요할 땐 서로에게 의자가 되는 인생 동반자가 있다면 좋은 관계다. 그러나 한 쪽만 의자가 되고 다른 한쪽은 의자에 앉는 관계라면? 비극이다. 서로에게 의자가 되고 이웃을 위해 의자 몇 개 내놓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고말고다.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 아니지만, 아주 별거가 되기도 한다. 두 사람이 함께 좋은 관계로 오래 간다는 것, 결코 만만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안 싸워야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 건 크나큰 오해다.



우리 부모님이 참 많이 싸우고 사셨죠. 어린 제게 그게 너무 큰 상처였어요. 나는 커서 결혼을 안 하든가, 한다면 절대! 안 싸우고 살 거야. 일찌감치 제 인생철학이 될 정도였죠. 애들에게 내가 받은 상처를 대물림할 순 없다는 생각이었죠. 그러나, 그러나, 안 싸우고 살아 봤더니, 어땠을까요? 아~~ 한 쪽이 한 쪽의 의자가 돼 가고 있던 걸요? 한 사람의 목소리 속에 또 한 사람의 소리가 흡수돼 버리던걸요? 싸우지 말고 살아라, 그건 결혼생활의 팁이 될 수 없어요. 오히려 잘, 힘써, 싸우며 삶을 만들어 가라 해야죠. 안 싸우고 사는 결혼생활이란, 자칫 위장된 평화, 껍데기 평화, 가식덩어리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그렇게 살았더랍니다, 어머니!~




언박싱의 끝에도 옥에 티가 있었다. 쓰레기였다. 이 엄청난 쓰레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마음이 불편했다. 속포장 비닐은 재활용 쓰레기 봉지로 쓰기로 했다. 거대한 상자에 종이며 책 쓰레기들 담아 오랜만에 집 앞 고물상에 가져갔다. 종이 25킬로에 1,500원 받았다. 너무 싸다. 애들 쓰던 의자는 하나만 남기고 버리기로 결정했다. 폐기물 딱지 사는 돈 아끼며 쓰레기를 집안에 둘 것인가? 잠깐 생각했지만 버려야 했다. 쓰레기를 안 만들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싸우지 말고 살아라'는 말처럼 공허한 고민이겠다. 멋진 새 의자로 시작한 글이 쓰레기로 결국 끝난다. 아~~ 이게 뭐지? 뭐긴 뭐야 사는 모습이지. 이렇게 위로하며 마무리 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