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앵갤스 '공산당 선언' 비판
소비자와 노동자가 플랫폼에서 맞춤화된 니즈를 충족해야만 살 수 있는 다품종 극 소량생산 시대가 찾아왔다. 이제 제조강국 한국에서도 다양한 소셜의 데이터 분석과 소비자 맞춤화된 생산을 위하여 모든 공정이 스마트화되고 인공 지능화되는 스마트 팩토리의 도입을 앞두고 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선진국을 중심으로 제조를 위한 R&D와 생산시스템을 함께 진행하고자 많은 부분에서 리쇼어링 현상이 발생하고 있으며 이것이 가능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더 이상 개발 도상국의 싼 인건비와 투자를 통해서 생산을 이루는 것이 아닌 인공지능과 로봇 그리고 맞춤화된 생산으로 본사가 있는 자국의 수요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스마트 팩토리가 현실 가능화 되면서 제조업의 자급자족과 생산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급자족의 제조업 스마트 팩토리 시대에 나는 뜬금없이 마르크스와 앵갤스의 '공산당 선언'을 언급하고 싶다. 그들이 말한 사회주의적 혁명이 주장을 했었던 그 당시에는 현실화되기 어려웠겠지만 지금 이 순간 스마트 팩토리와 빅데이터로 맞춤화된 수요 충족이 가능한 경제 상황에서는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앵갤스가 선언한 '공산당 선언'은 자본가들의 힘이 너무도 막강하여 노동자와 소비자를 착취하는 것에 대한 사회 투쟁을 이야기하는 선언이다. 그 당시에는 자본가가 막 봉건주의를 무너뜨리고 정치적, 경제적, 사회 문화적으로 너무 힘이 막강했던 시기였고 전 세계적으로 소비시장은 매우 빠르게 증가하여 산업시설과 자본형성이 매우 필요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노동자와 소비자는 언제나 을의 입장에서 착취와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전 세계 공급이 과잉되고 소비자가 다양한 소셜에서 맞춤화된 상품과 서비스를 요구하는 시기가 찾아왔으며 과거와 다르게 자본가보다 훨씬 더 힘이 센 존재는 이제 소비자와 노동자가 된 것이다. 상황이 역전된 만큼 이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착취나 소비자에게 강압적인 억압을 줄 수가 없다. 이제는 노동자, 소비자 모두 자본가의 자본에 참여하여 맞춤화된 시장 개척을 위한 아이디어와 협업이 절실하게 필요해지는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따라서 나는 여기서 마르크스와 앵갤스의 노동자와 소비자들의 맞춤화되고 계획된 경제로 '필요한 만큼 분배받고 능력만큼 일하는 이상 사회'가 지금에서야 가능하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역사적으로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비효율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증명은 역사적으로 끝난 상황이다. 따라서 당시의 마르크스와 앵갤스가 주장했던 '공산당 선언'을 비판해보고 그들의 주장들 중에서 현재 21세기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그들의 철학을 어떻게 응용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자 한다. 문답식으로 구성하여 주제를 세분화하였다.
1. 마르크스 앵갤스 공산당 선언과 공산주의는 왜 과거에는 실패하였나?
마르크스와 앵갤스는 자본가 주의가 한참 무르익을 때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였으며 이때는 자본가들은 입지가 성장 중이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한계가 있었다. 즉, 자본가 계급은 이제 막 중세 봉건주의를 이겨낸 혁명세력이었기 때문에 정치, 경제적으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서 노동자들은 단순히 무력투쟁과 산업시설 파괴만으로 지속적인 수요로 생산을 증가시키고 있는 자본가 세력을 이기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2. 그러한 노동자 혁명이 21세기에 와서야 이제 현실화 가능하다는 이야기인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언제까지나 부르주아 세력들이 중세 봉건시대를 이겨내고 사회 주축이 된 것처럼 이제는 노동자, 소비자들이 힘을 키워 자본가들을 몰아낸 후 독재를 이루고 주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소비시장이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었고 산업시설의 발전이 매우 중요했던 시기였으므로 노동자들보다는 자본가들이 힘이 강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그러나 전 세계 시장이 모두 개발되어 더 이상 수요시장을 찾을 수 없고 생산 인구감소, 고령화, 환경오염, 사회적 양극화 및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수요 대비 공급이 포화되어 혁신의 한계에 이른 지금의 21세기 상황에서 이제는 자본가 계급의 힘이 약해지고 노동자, 소비자 중심의 산업체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그때보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성공이 더욱 현실성이 있어진다.
이것은 결코 자본가들의 의식과 도덕성이 향상되어서 이제는 착취에서 포용으로 변하자라는 것이 아니라 SNS와 스마트폰이 등장함에 따라 이제는 자본가의 시장 창출의 독단적 결정과 착취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막을 내리고 소비자, 노동자 중심의 경제 생태계가 탄생되었다는 것이다.
3. 어떠한 근거로 21세기 지금에 와서 노동자 혁명이 현실화되는가?
마르크스의 과학적 유물론에 따르면 그간 오래 지속되었던 중세 봉건시대가 막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중세시대의 농업에만 의존했던 생산량보다 더 많은 생산량을 가져오는 부르주아 들의 생산시설의 개발로 그간 농업경제 토대로 세워졌던 귀족과 농노, 장원제와 같은 귀족 체제가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즉 사회계 몽이나 시민들의 의식의 발달로 귀족 중심의 사회를 무너뜨리고 부르주아 사회를 만든 것이 아니라 오로지 생산량의 급증과 생산시설의 발달이라는 '물질'적 변화에 힘입어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역사의 모든 방면의 상부구조를 바꿨다는 점이다.
이 말은 곧, 프롤레타리아들도 자본가들처럼 어떠한 생산 시스템의 개혁과 생산량 급증을 이루어 내는 가시적 물질 증대 성과가 없이 단순히 자본주의에 대한 물리적 투쟁으로만 생산시설 공동 소유와 소유권 폐지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이루어 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과학적 유물론에 따르면 노동자가 부르주아 세력을 이기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세력 이상의 생산시설 및 생산량의 패러다임을 가져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 앵갤스 그 당시에는 수요가 증가하고 생산시설이 발전하는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들은 부르주아 생산체계보다 더 나은 대안을 찾아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르주아가 여전히 힘이 더 세었지만 지금은 이와 다르다. SNS와 스마트폰 스마트공장 등 수요중심의 소비자 참여, 노동자 아이디어 참여의 플랫폼적 생산시스템이 등장하였고 이것들은 맞춤화되고 세분화되는 지금의 공급과잉과 저성장 시대에 효과적으로 수요자의 니즈를 충족할 수 있기 때문에 기존의 부르주아 보다 더 생산량이 나은 방식이 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전적으로 가능해졌다.
즉, 이는 마르크스의 과학적 유물론을 근거로 SNS와 스마트폰으로 노동자, 소비자 중심의 맞춤화된 생산수단의 변화와 생산량의 변화가 과거의 '자본가의 억압과 착취'의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역사의 모든 방면의 상부구조를 '자본가와 노동자 소비자의 협업과 자본참여'의 방향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4. 사적 사유와 자본을 폐기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 아닌가?
소비자 노동자 중심의 생산시스템에서는 자본가의 부를 축적하기 위한 임금노동자의 '임금' 그리고 자본가의 '자본'이라는 절대적 소유가 무너지고 노동자와 자본가가 함께 생산을 하고 소비자의 참여를 통한 맞춤화된 산업생태계를 만들기 위하여 각 기업의 이해관계자들(정부, 노동자, 소비자, 환경단체, 임직원 등) 자본참여 관점으로 소유관계가 바뀐다. 이제까지는 자본의 무한 확장을 통하여 1,2,3차 산업혁명 등으로 늘어나는 소비를 충족하고 생산시설을 만들고 경제 생태계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자본가들에게 '자본'이라는 절대적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고 자본가 위주의 공급 중심의 양적 산업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그리고 임금 노동자들에게는 자본을 증식해주는 노동력의 대가로 '임금'을 지급하여 자본가들의 노동자 착취는 그들의 자본적 탐욕 충족과 함께 사회의 자본주의를 성장시키기 위해 당연시되었다.
그러나 21세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소유권 폐지란,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는 것이 아닌 노동이 자본을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SNS와 스마트폰의 발달로 인하여 소수 맞춤화된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에서는 소비자와 노동자가 곧 시장의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이 자본가들보다 더욱 커지므로 이들을 과거처럼 억압하거나 착취하여 산업을 이끌어 나가기는 어렵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노동자와 소비자의 권위 향상과 이에 따른 복지 및 처우는 전보 더 매우 급진적으로 개선이 될 것이다.
5. 노동자들이 생산시설을 독점하고 정부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을 인정하는가?
마르크스와 앵갤스는 프롤레타리아들의 생산수단 국유화와 정부 구성으로 자본가들의 반항을 억제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 후에 계획 경제와 공공성을 바탕으로 한 경제생산을 실시, 기존의 자본가 위주의 일방적 수요 창출, 생산으로 인한 대공황의 빈도를 줄이고 수요자-노동자 중심의 니즈에 맞는 맞춤화된 생산으로 '적게 일하고도 많이 벌고 여가가 충분한 사회'가 바로 공산주의 사회라고 주장하였다.
당시에는 스마트폰과 SNS라는 플랫폼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가장 익숙한 네트워크의 결집 장소와 플랫폼은 '국가라는 정부'였을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 소비자들이 정부를 구성해서 자본가들을 몰아내고 맞춤화된 생산을 이루어내기 위한 국가 권력 투쟁을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는 플랫폼이 정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스마트폰과 정보통신 발달로 이젠 네트워크 구축이 용이해지고 플랫폼은 온 -오프라인 어디에서나 구축이 가능하다. 소비자, 노동자 위주의 산업생산을 위한 플랫폼 구축이 자본가들이 가능해짐에 따라서 노동자 독재가 아닌 노동자, 소비자, 자본가, 정부 등 이해관계자 연합의 맞춤화된 시장 창출과 지속 가능한 경영이 가능해지는 시대가 되었다. 즉 마르크스 앵갤스 시절이나 지금이나 자본가의 독주가 아닌 소비자, 노동자, 이해관계자 맞춤화된 니즈 충족이 중요하다는 점은 같으나 그 플랫폼 수단에서 마르크스 앵갤스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정부라는 곳이 유일한 플랫폼이었을 뿐이다.
6. 노동자, 소비자 중심의 산업경제로의 전환은 마르크스의 사회 진화론적 관점인가?
마르크스와 앵갤 스는 프롤레타리아들이 자본가 계급을 무너뜨리고 생산시설과 정부 권력을 독점하여 자본가들의 저항을 몰아낸 후에는 각 프로레탈이아의 연결성으로 인하여 서로 필요한 상품과 서비스를 맞춤화된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공급이 과잉되는 현상이 발생되지 않고 적절한 수준의 경제를 유지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분배를 위한 지배계층을 만들지 않고도 필요에 따라서 분배받고 능력만큼 일하는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더 이상의 지배계층이 없는 사회인 이상 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사회진화론을 마르크스는 주장했다. 또한 중세시대보다 더 많은 산업생산량이 발생하고 있으므로 세상은 앞으로 더 풍요로운 물질적 분배를 이룰 수 있을 것이므로 사적 소유권을 굳이 주장하지 않아도 모두가 평등하게 풍요롭게 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회가 진화한다는 근거는 어쩌면 개인적 주장이나 망상일 뿐이다. 반드시 논리에는 증명이 필요한 부분인데 차라리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사회에는 지배계급이 있었던 경우가 더 많으므로 표본적으로 오히려 사회는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공존한다는 것이 더 합당한 논리일지 모른다. 즉 지배계층이 없고 풍요로운 물질로 인한 평등한 세상으로의 단계적 진화라는 것은 소망일 뿐이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가장 적절한 예측은 14세기부터 시작된 대항해시대와 식민지 개척 시대를 기준으로 하여 역사는 반복된다는 가정 아래 지금부터는 중세시대의 문화로 회귀한다는 주장이 더 일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중세 유럽을 가장 크게 특징지어 보면 장원 제도, 기독교, 농노라고 칭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세 유럽은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사회의 리더국이 없는 국제질서 속에서 모두가 충성과 쌍무적 계약관계로 리스크와 위기를 극복했던 분열의 시대였다.
지금과 비교해보면 스마트 팩토리와 인공지능으로 이젠 선진국의 제조산업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지고 사회의 극심한 양극화와 환경오염 등 시장 창출의 리스크와 소비자 맞춤화된 시장의 급변으로 인하여 전례 없던 여러 가지 위기를 극복하고자 자본가들은 다양한 전문가와 소비자 참여를 중시하고 이는 중세시대의 장원 제도와 같은 '쌍무적 계약관계'의 플랫폼 내 조직 구성이 이루어지는 점이 비슷하다. 물론 농노의 경우에는 스마트 팩토리의 다양한 로봇이나 인공지능으로 볼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중세시대에도 농노들에게도 세금을 거두었던 것처럼 스마트 팩토리의 로봇이나 시스템에도 세금을 물 수 있다는 점이다. 스마트폰과 플랫폼의 발달로 각 공급과잉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산업들은 시장에서 과거 중세시대의 길드 및 도제제도와 같은 방식을 통한 공급 억제 방식이 사용될 수 있다. 중세 유럽의 길드 제도는 각 전문가들이 모여 한정된 수요 시장에서 공급이 과잉되지 않도록 서로 협력하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낸 효과적인 자치 규약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비유가 억지 주장이 될 수도 있으나 마르크스처럼 단순히 다윈의 진화론을 차용하여 사회는 무조건 물질의 번영으로 진화한다는 억지 주장 만한지는 모르겠다.
문제는 너무도 과학적 유물론적으로만 보아서 오직 물질의 증가와 번영으로만 모두가 평등하게 분배가 가능한 사회는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고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사적 소유권의 개념이 달랐다고 한들 이상적으로 모두가 평등하게 분배해서 공평하게 살아갔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더 많이 가진 지배계층과 덜 가진 피지배계층은 존재할 것이다. 단 지금은 과거보다는 지배계층인 자본가와 피 지배계층인 노동자 소비자들이 모두 맞춤화된 생산을 위한 참여형 경영이 가능해지고 서로가 착취와 억압에서 벗어나 민주적인 활동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점은 기대해볼 수 있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사회진화론적 주장은 비교적 납득이 어려운 부분이지만 21세기 프로레탈이아 혁명을 위한 시기는 그때가 아닌 바로 지금 이 시기이며 이제는 모든 노동자들이 자본가의 억압이나 착취에서 벗어나 다양한 아이디어와 전문적 지식으로 플랫폼에 참여하여 자본의 형성에 참여하고 더 좋은 복지와 혜택을 받으며 인간답게 사는 노동사회를 구축할 수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