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의 대상인가, 주체인가.
설명할 것도 많고, 정리할 것도 많지만 무엇보다 관계의 기선제압 같은 그런 시간이다.
교사 N년차, 한 순간도 대충한 첫수업은 기필코 없었다.
힘도 많이 들어가고, 준비도 많이 했었다.
시작부터 열정으로 진득하게 채우는 게 전공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어쩐지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하고 싶은 건 어떻게서라도 하는데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어쩐지 시작을 못하고 해도 부자연스럽다.
이게 매너리즘인가.
이게 선배들이 말했던 힘이 빠지는 시기인가.
그간 한 땀 한 땀 만들어 둔 자료가 백업하다가 사라져도 어쩐지 아깝지가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어쩐지 뭔가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매년 새로 만드는 학습지와 자료들이기에 저장해둬도 다시 꺼내 쓰지 않기에 아깝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만들어 남기고 공유하는 게 참 즐거웠던 나에게는 낯선 마음이었다.
사실 지난 몇 년간 정말 재미나게 힘겹게 열심히 재밌게 일했다.
그리고 일을 하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갈등을 만났고 몇 개는 피하고 몇 개는 직면하고 몇 개는 지혜롭게 처리했다. 그리고 조금 아팠고, 세상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접했고, 매너리즘이 찾아왔다.
학기가 시작했다. 시작 전부터 출근하면서 준비하고 회의하고 세팅하고 해야 할 일들을 해나갔다. 나만 느끼는 내 매너리즘을 한 켠에 품고 말이다. 아이들에게 뭘 가르쳐야 할지 점점 더 모르겠는 마음이 참 무거웠다. 교과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삶을 살아가는데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 교과를 통해 삶을 가르치는 것인데, 나는 어떤 삶을 아이들과 공유할 수 있을까. 항상 그 생각에서 시작한 첫수업 설계였다. 이번에는 그게 참...
그래도 일말의 책임감이 있기에 이 마음은 나만 알고, 수업을 하자는 마음으로 준비했다. 간단한 학습게임으로 첫수업을 열자, 어떤 학습지도 만들지 말고, 요즘 워낙 잘 나온 앱을 활용해서 아이들도 즐겁고 나도 즐거운, 그러니 울림은 없어도 뭐라도 배우는 그런 수업을 하자. 그렇게 기기를 들고 들어갔다.
첫수업인데 종이 쳐도 앉아 있지 않고 서있는 아이들을 보니, 시작부터 삐끗이다. 무게를 잔뜩 잡고 문 앞에 기대어 서서 빤히 쳐다봤다. 슬금슬금 자리에 앉는 아이들.
그리고 들어가며 목소리에 힘이란 힘은 다 주고, 앉으세요 한 마디, 첫 날 부터 지도할 게 많네요 라는 두 마디의 클리쉐로 인사를 한다. 그래도 지금 학교에 N년차라 안면이 있는 아이들이라 서로 무게 잡을 필요는 없었다. 종이 치면 앉아있어야 한다는 걸 알려는 주되, 수업 분위기를 헤치지 않는 것. 무섭게 인사하는 듯 하며 따뜻한 말로 분위기를 풀어내는 것. 웃긴 것과 우스운 것을 구분하는 것. 교사를 하며 점점 느는 순발력과 나름의 기술이다. 전문성이 바탕이 되어야 효과가 배가 된다.
군기를 바짝 잡고, 새학년이 되었으니 잘 하자하고 첫 잔소리를 마무리 했으니, 이제 멋지게 준비한 수업을 하면 시나리오에 따른 극 전개 완성가 완성된다. 그런데, 어디에나 항상 복병은 있으니, 바로 인터넷과 스크린. 교실 유선 인터넷이 노트북에 연결되지 않고, 이 교실은 스크린이 현재 고장난 상태라고 한다.
극으로 치면 NG가 났다. 왕NG다. 요즘 말로, 킹받는 상황. 그러나 흠, 이럴 때 일수록 프로는 당황하지 않고, 기자재 담당 학생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러나, 고장난 티비는 기자재 친구의 터치 몇 번에 정신을 차리지 않고, 나는 재빠르게 상황을 중계한다.
아이고, 재미난 수업을 준비했는데, 티비와 인터넷이 안 되니 진행을 할 수가 없구나.
그리고 나보다 훨씬 통통 튀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을 아이들에게 묻는다.
첫 날인데, 어떤 수업을 하면 좋을까?
기다렸다는 듯이 한 아이가 입을 연다.
선생님 첫인상에 대해 이야기해요
오, 첫사랑도 아니고 첫인상이라니.
그래 좋다! 어떤 이야기도 받아들일테니 선생님 첫인상에 대한 1분 스피치를 돌아가며 하자! 욕과 아부 제외, 솔직하게 말하자. 근거가 있는 것은 당황스러운 얘기라도 받아들일게.
발표를 한다니 웃던 아이들 표정이 굳는다. 그래도 빠르게 아무 관심 없던 선생님의 첫인상에 대해 1분간 말할 거리를 찾기 위해 무던히 생각하는 모습이 얼굴에 비친다.
그 생각 활동이 조금더 쉽도록 칠판에 첫인상에 관한 키워드를 하나씩 적어보자 하니 우르르 나와서 하나씩 적고 들어갔다.
그리고 차례 차례 한 명씩, 나와 발표를 한다. 바로 앞에 서 있는 선생님에 대해서. 어떤 가감도 없이 그저 솔직한 그 마음 그대로를.
아이들 이야기를 들으며 그 묵직한 무언가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저런 생각을 하는구나, 저런 생각을 했구나, 저렇게 자기 의견이 있구나, 아이들 한 마디 한 마디를 들으며 아이들이 '살아있는 생명체'로 느껴졌다. 내 마음에서 말이다. 나에 대한 첫인상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사실 그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제안에 응하면서 그 짧은 순간에 훅 겁이 나기도 했다. 아이들이 쏟아내는 말에 혹여나 내가 상처를 받을까봐. 그러나 아이들은 신사적이었고 또 설령 부정적인 내용이 있어도 그건 그 아이의 의견이니 존중해 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 수업의 대상이 아닌 주체로, 하나의 인격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벽이나, 기계를 보고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일이라는 것에 희한하게 힘이 났다.
결국은 아이들이었다. 그 모습이 어떻다고 한정하거나 정의할 수 없는, 살아있는 사람. 삶.
그렇게 한 학기를 움직일 힘을 얻었다.
아이들이 진행한 첫 수업에서.
잘 부탁한다. 얘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