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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교사 Mar 21. 2022

전시회를 할겁니다

밟힌 학습지로요 

학습지는 나의 자존심이자 자부심이다. 보통 근무시간엔 절대 학습지를 만들 수 없다. 왜냐고? 바쁘니까. 쉬는 시간마다 쏟아지는 너희들의 고객의 소리, 그리고 서류 작업, 그리고 평가. 가장 중요한 수업 준비는 원래 퇴근하고 하는 게 프로다. 훗, 그래 난 전문직이니까. 

하며 스스로 달래며 노트북을 타닥타닥 치며 내일의 무기를 준비한다. 사실 이 작업은 생각보다 재밌다. 그래서 하는 거다.   

신규 때는 학습지에 아주 필요 이상의 열정과 에너지를 들여 재능 낭비를 했더랬다. 로고도 만들고 어떻게 하면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하게 만드는 자료가 될까 고민하며 초성만 남겨두기도 하고 정말 한 땀 한 땀 일본 이태리 장인 뺨치는 정성과 노오오오력으로 한 장 한 장 최선을 다했다. 지금은 물론 연륜과 경험치가 쌓여 적당히 할 줄 아는 멋짐을 곁들이고 있다. 그래도 절대 남이 만든 학습지를 그냥 쑥 - 쓰진 않는다. 뭐, 아직 조금은 남은 자존심이고 자부심일 수도 있으나 아직은 그렇게 딱 내 맘에 드는 학습지를 만난 적은 없어서 그런 것으로 치자. - 니 마음에 뭔들 맘에 들겠니 - 아무튼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으니. 

작품이 고객에게 전달될 차례. 그렇게 만든 학습지를 컬러로 인쇄하고 싶지만 학교 예산과 환경을 생각하여 흑백으로 인쇄한다. 나 때는 말이야, 학습지 종이도 갱지여서 지우개질 몇 번 하면 구멍났었는데 말이야, 요즘은 빳빳한 하얀 A4다. 거기에 컬러를 더하고 싶은 욕심은 넣어둔다. 교과서가 얼마나 잘 나오는데, 학습지까지 컬러면 재미없으니까. 흑백으로 인쇄해서 나눠준다. 


고객의 성향. 받자마자 파일철에 정리하고 이름부터 쓰는 예쁜이들 1/2, 교과서 사이에 쏘옥 끼운 채 이름 쓰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냥 짝궁 답 보고 글자 휘갈기는 멋쟁이들 반에 반 , 그리고 내가 지금 받은 것은 선생님의 작품인가 지나가는 아지매가 준 전단지인가 눈길 한 번 안 주고 손 길 한 번 안 주는 저세상 쿨인들 일부다. 그래도 보관이라도 해주면 때땡큐. 학기말에 검사하니 보관은 필수. 그렇게 한 시간 나와 그대들의 인지와 눈치와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엎치락 뒤치락의 한 타임이 지난다. 히유, 오늘 수업도 나 좀 멋졌다.며 유유히 교실을 퇴장. 그렇게 하루가 지나 그대들이 떠난다. 

당신이 떠난 자리에. 그리고 그곳에는 항상, 한 번은 안 그래도 될 것 같은데, 안 그래도 되는데, 내 예상은 좀 빗나갔음 하는데, 항상... 어딘가에 남겨진 하얀 미확인 물체가 나를 보고 손짓한다. 가까이 다가간다. 아니길 바라며, 간절히 바라지만 그 슬픈 느낌은 틀린 적이 없다. 

구겨지고 밟힌 학습지. 그냥 학습지가 아니고, 내가 한 땀 한 땀 장인 정신으로 퇴근 후 소중한 시간을 들여 만든, 그 학습지! 얘는 그 사이 어떤 모진 세월을 겪었는지, 두 세번의 접힌 자국과 뜯겨 나간 모서리, 그리고 옛날 옛적 빙하기 전 행복하게 살았던 공룡의 발자국 만한 검은 발자국 하나. 이게 공룡의 발자국이면 내 화석을 발견했다고 인류사에 길이 남을 큰 일을 했다고 큰 소리로 외쳐 오늘의 발견을 영상으로 찍으련만, 그 발자국은 이 공간에 머물다 간 나의 사랑스러운 고객님들 누군가의 것이리라. 아핫 즉 쓰.레.기. 

학습지 검사할 때 없는 놈 디져쒀..를 외치며 - 어머, 교사의 워딩이 이래선 안 되는데 말이죠 호호 - 

아, 뭐 그럴수도 있지. 그래, 이게 뭐라고, 그래, 그럴 수 있어 하며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다는 걸 다시 확인하며 툭툭 털어 쓰레기통에 버리려다, 개구진 생각에 씨익 입꼬리가 올라가며 덜렁덜렁 들고 나의 아지트로 가져온다. '내일 주인 찾아 줘야지~' 으흐흐... ^^  다리미질해오라 할까 

그러다 문득 생각 하나가 번쩍인다.

전시회를 하자. 밟힌 학습지로! 

쓰레기가 갑자기 작품의 가치로 변하는 순간이다. 


갑지가 시상도 떠오른다.

바닥에 떨어진 학습지 함부로 밟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학습의 디딤돌이 된 적이 있었더냐.. 

표절냄새가 난다. 쩝.

오늘 하루 끝! 




나의 노력과 정성이 밟힌 건 마음 아픈 일이지만, 아이들 개개인의 시간과 인생에 내가 만든 학습지 고거 하나 뭐 얼마나 대수일까. 사실 학습지를 만드느라 애를 쓴 건 사실이고 나에겐 큰 의미고 노력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고, 생각했던 포인트는 자기 관리를 어떻게 가르쳐줄까였다. 학습지 관리를 시키는 것도 사실은 '관리'의 역량을 키워주기 위함이다. -아우 교사냄새!- 그저 바라는 것은 아이들의 마음에 학교에서의 하루가 즐거웠으면 좋겠다. 뭐라도 하나 배웠으면 좋겠다. 좋은 추억들로 가득찼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중에 조금 아픈 일을 만나거나 힘든 일을 겪거나 생각지 못한 일을 만났을 때 잘 쌓아둔 좋은 추억이나 배움에서 단단한 마음이 발휘되어 다시 일어서고 계속 걸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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