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집에 있어요..
세상에 나온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작디작은 아기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크나큰 아픔이었을지도 모른다.
병원에서 24시간 아기와 꼭 붙어 지내는 동안 나는 생각했다.
'우리 아가, 이렇게라도 엄마랑 더 같이 있고 싶었구나.'
앞으로 엄마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시간이 길어질 거라는 걸 알았던 걸까?
대학원 복학을 한 달 남겨두고,
나는 그 자그마한 아기를 내 품에서 떼어내 낯선 공간에 두고 나오는 연습을 해야만 했다.
어린이집이라는 명칭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자그마한 아기를 그곳에 맡길 때마다 왈칵하고 흘러내릴 것 같은 눈물을 참아야만 했다.
그러다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고,
그동안 참았던 눈물은 죄책감과 함께 매일매일 장대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결국 아기는 어울리지 않는 어린이집에는 가지 않게, (갈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라는 이름표를 달고도, 어울리지 않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어느 정도의 고난이 따를지 생각해볼 겨를조차 없이 나는 한 아이의 엄마이자, 학생으로 살게 되었다.
이후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유난히 길었던 우여곡절의 시간.
그 시간 끝에 나는 졸업장이란 걸 받았다. 아이를 포함한 모든 가족의 희생으로 따낸 졸업장이었다.
졸업장을 받아 든 그때, 세상은 코로나라는 바이러스와 함께 점점 흙빛으로 물들어갔지만,
내 마음은 성취감과 포부로 반짝였다. 그렇게 계속 빛날 것만 같았다.
“졸업했지? 요즘 어떻게 지내? 일은 시작했는지 궁금하네~”
졸업장을 받고 몇 달이나 지났을까. 동기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저 그냥 집에 있어요~”
“아~ 그래? 애가 아직 어리지~?”
늘어만 가는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를 감당하며 점차 내 마음은 그늘져갔다.
그동안 어쩔 수 없이 밀어낸 아이와 값진 시간을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아 불안했다.
공부의 끈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 치고, 일을 하려고 발버둥 쳤다.
“엄마! 이것 좀 봐! 계속 계속 보고 있어~!”
“엄마! 저거 시끄러워!”
아이와 한 공간에 있지만
내 눈은 스마트 폰 속 영문 텍스트에
내 귀는 흘러나오는 영어 소리에 사로잡혀 있기 일쑤였다.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아이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시간을 스스로 빼앗았다.
“할머니네 갈까?”
“아니~”
“엄마는 또 공부하러 가게?”
아이는 이제 할머니 댁에 가는 걸 싫어한다.
‘할머니 댁에 가면 엄마는 사라진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나 보다.
엄마가 학교에 가고, 과제를 하고, 스터디를 하는 동안
할머니 댁에서 시간을 보내며
엄마와 함께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양보해준 아이에게
나는 내 생각만 하는 엄마였던 걸까?
아이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을 더 키우지 말자고 매번 다짐했지만,
프리랜서 통번역사로서의 일과 공부에 대한 욕심, 조급함, 불안감에 매번 무너지고 말았다.
일과 육아 둘 중 하나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매일매일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리고 한동안 한껏 어지럽혀진 마음 때문에 이도 저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