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환경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호주의 노동환경은 한국과 많이 다르다. 요즘 한국에서도 탄력근무제나 잡 셰어링, 일과 삶의 균형 등을 논하며 노동환경 개선에 대한 고민을 하는 듯한데 호주에서는 이런 제도들이 이미 시행되고 있고 자리를 잡았다고 보기 때문에 내가 그동안 보고 체험했던 호주 노동환경에 대해 몇 가지 얘기해볼까 한다.
1. 주당 근무시간은?
보통 사무직의 경우 9시부터 5시까지 일한다. 중간에 30분 점심식사를 하는데, 이를 빼면 보통 하루 7.5 시간을 일하고 5일 근무를 한다 치면 37.5 시간을 일하는 셈이다. 임금은 주로 2주 (Fortnight)에 한 번씩 지급한다. 호주에서는 연봉을 논할 때 주당 몇 시간을 일하고 시간당 얼마를 지급하겠다는 식의 시급을 중심으로 계산한다. 한국에서는 주로 월급과 보너스로 연봉을 논하고 근무시간은 고용자 마음대로인 경우가 많다.
점심시간은 한 시간까지 쓸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30분 이상 쓰지 않는다. 심지어는 컴 앞에서 도시락이나 샌드위치로 때우며 점심시간을 전혀 쓰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흔하다. 점심시간 동안은 시급이 계산되지 않기 때문에 30분이라도 더 일하고 더 돈을 버는 것이다. 일을 빨리 끝내고 퇴근을 제때 하려는 것이다.
2. 근무형태는?
풀타임(Full time), 파트타임(Part time), 캐주얼(Casual) 3종류로 나눈다. 풀타임은 보통 주당 32시간 이상 일하는 경우를 말한다. 파트타임은 그 이하의 시간을 정기적으로 일하는 것을 말하는데 둘 다 정규직이다. 유급휴가나 근로자 보험 등의 복지 혜택을 받는다. 캐주얼은 말 그대로 부를 때마다 가는 경우로 비 정규직인데 휴가나 보험 등의 혜택이 없는 대신 시급은 정규직보다 높게 책정된다.
캐주얼직은 단순하게는 식당 웨이터에서부터 학교 선생님 병원 간호사까지 전 직종에서 활발히 고용된다. 풀타임 일을 찾지 못해 경력을 쌓느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일을 하는 비자발적 캐주얼도 있지만 출산이나 은퇴 후 자신의 제한적 환경에 맞게 자발적으로 캐주얼을 선호하는 경우도 많다. 가령 이웃집 엄마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현역에서 은퇴한 뒤에도 초등학교 임시 교사로 짬짬이 일한다. 시급으로 치자면 현역 교사들보다 수입이 높다.
3. 탄력근무제의 탄력도는?
일단 직종마다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매우 자유롭다. 수년 전 내가 일했던 직장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 사무실 최고 지위자였던 매니저는 매일 오후 3시면 퇴근을 했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픽업해야 했기 때문이다. 점심 먹고 나면 좀 앉았다가 퇴근을 해버리는 그녀를 보며 많이 놀랬다. 어디 그뿐인가. 금요일엔 자기 소유의 할러데이 하우스(주말 별장)에 일이 있어 지방에 내려가 봐야 한다며 그곳에서 재택근무를 하겠다며 출근도 안 했다. ‘긴 주말을 휴가로 보내려는 꼼수가 아니겠는가? 아무리 보스라지만 너무했다. 이렇게 막 나가도 된단 말인가.’ 이런 생각들이 많이 들었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 그녀의 출근 근무 일지를 보고는 다시 한번 놀랬다. 그녀는 아침 7시에 주로 출근을 했고 일이 많을 때는 새벽 6시에도 출근을 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 어두운 사무실에서 혼자 불을 켜고 일하는 그녀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종종 하는 재택근무도 몇 시간을 무슨 일을 하며 보냈다는 보고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는 풀타임으로 계약된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고 있었다. ‘노는 게 노는 게 아니었구나.’
또 요일마다 등장하는 직원들도 달랐다. 어떤 이는 월수금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누구는 목금을 일하고. 어떤 때는 두 직원이 한 가지 일을 잡셰어링을 하여 돌아가며 출근을 하기도 했고. 어떤 일은 담당 직원이 이틀만 출근해도 충분한 일이고, 어떤 일은 이틀은 이쪽 사무실에서 삼일은 저쪽 사무실에서 일하는 식이었다.
일률적으로 출근하고 퇴근하는 문화에 익숙했던 내게는 참으로 놀라웠다. 모두들 자기 사정과 업무에 맞게 출근하고 퇴근하고 각자 시간 관리를 하고 자기 맡은 일을 계획하고 책임지는 환경이.
4. 야근과 주말근무는?
호주에서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정말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고용주가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분야이기도 하다. 야근을 하면 계약 시간의 임금보다 1.5배, 주말에는 2배의 임금을 법적으로 지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치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대략 이런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피치 못할 회의나 행사가 있지 않고는 퇴근시간을 지연하는 일은 없다.
내가 다니던 회사도 가끔 야간 회의나 주말 행사가 있었는데 (전 직원이 아닌 업무 관련자들만 나오는), 주정부나 단체로부터 기금을 받아 운영하는 비영리 회사였고 예산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일일이 추가로 수당을 지급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경우엔 Time in lieu란 제도를 시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임금을 추가로 지급하지는 않지만 일한 시간만큼을 적립했다가 원하는 때에 휴가로 쓸 수 있어서 직원들도 환영하는 편이었다.
가령 아이들 학교에 행사가 있을 때 적립해 놓은 시간으로 반차를 내서 다녀올 수 있다. 상사 눈치나 허락을 구할 필요도 없고 (보고는 해야 되겠지만) 수입이 줄어들지도 않는다.
5. 작업 시스템 구축이 우선
일면 매우 복잡해 보이기도 하는 이런 노동환경은 개개인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는 필연적이다.
내가 만났던 치과의사는 일주일에 3일은 시드니에서 이틀은 멜번에서 근무했다. 비행기 타고 한 시간 거리인데 가족과 사는 시드니 거주지를 옮기고 싶지 않았고 멜번에서 파트타임으로 공부도 하고 싶었던 그녀에게는 환상적인 근무 조건이었다.
돌 지난 쌍둥이를 포함해 애 셋을 키우는 이웃집 엄마는 이 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밤을 새운다. 간호사인 그녀는 육아휴직을 냈지만 경력관리와 부수입을 위해 주말 야근을 자청했다. 시급이 더블이니 하룻밤만 새도 수 백 불을 번다. 아침 일곱 시에 퇴근해서 늦은 오후까지 밀린 잠을 자는데 휴일이니 남편이 아이들을 봐준다. 밤 근무지만 바쁘지 않아 육아를 벗어난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너무 좋단다.
아들 담임은 얼마 전에 결혼을 하고 2주간 신혼여행을 떠났다. 시골학교지만 임시교사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은퇴한 교사 등 임시교사 데이터 베이스에서 적당한 사람을 골라 연계하면 그만이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은 작업 시스템이 분명하게 구축되어 있고 모든 업무가 매뉴얼에 따라 일률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분명하게 업무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고 그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자격과 능력을 갖추었다면 누구든 그 자리에서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업무가 이미 디자인되어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내가 출근 안 하면 회의도 안되고 업무도 진행이 안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의 존재감이 미약한 듯한 아쉬움이 있지만 내가 필요할 때 얼마든지 자리를 떠나 나 자신과 주변을 챙길 여유가 생긴다. 호주 사람들은 작업 시스템 구축을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인사부(HR: Human Resources)에서 내내 하는 일이 이런 디자인이기도 하다. 단기적으로는 시간과 자원이 소요되고 비효율적인 면도 있겠지만 무시해서는 안될 부분이다.
간단한 예로, 단체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주방에 들어가 봐도 호주인과 한국인은 일하는 문화가 다르다.
호주인은 저녁을 준비한다 치면 누가 고기를 구울 것인가 샐러드는 누가, 설거지는 누가 할 것인가를 분담한다. 고기 팀에 3명이 배정됐다면 고기 써는 사람, 양념 만드는 사람, 굽는 사람을 정하고 나서야 각자 자기 자리에서 일을 시작한다. 일이 많아 보여도 설거지 팀은 주방에서 물러나 자기들끼리 재밌게 논다. 한국인들은 모두가 주방에 우르르 몰린다. 나중에 설거지할 사람도 나가서 놀면 눈치 보이고 욕먹는다. 도마가 하나인데도 여러 사람이 칼을 들고 함께 일하겠다며 걸리적 댄다. 뭐… 표현이 좀 그렇지만 이런 차이가 사회 전반에 분명히 있다는 거다.
생산성과 효율성을 사회나 개인의 삶 안에서 제고해봐야 한다. 머리가 나쁘지도 않고 손 빠르기로는 수준급인 한국의 노동 생산성이 선진국에 비해 떨어지는 이유를. 오래 일하고 많이 버는 게 대수가 아니다. 내가 몇 시간 더 일해서 얼마의 수입을 더 올릴 때 나의 건강이나 가족의 삶의 질은 얼마나 달라질까에 대한 고민들을 해봐야 한다. 학교 다닐 때 등수 따지던 버릇대로 상위 10% 소득, 연봉 몇 억 등의 껍데기에 현혹되어 그에 따른 부작용이나 손해는 감안할 생각조차 않고 총수입 확대에만 몰두하는 개개 한국인의 삶과 한국 사회의 노동 환경은 달라져야 한다. (2012/3/26 씀)
* 대문사진-아침 일찍 자연산 굴을 채취하고 돌아와 선착장에서 파는 어부들. 현지직판임에도 싱싱한 만큼 가격은 오히려 배로 뛴다. 자신들의 노동비를 다 계산해 넣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