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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Dec 24. 2022

호주,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맞는 기분은..

계절이 다른 나라에 산다는 건.

한국과 다른 나라를 오갈 때 종종 시차를 경험할 것이다. 낮과 밤이 바뀌어 시차 적응으로 고생한 이야기를 듣는다. 멜번과 한국은 1-2시간 차이가 나 시차로 어려움을 겪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난 9월 한국과 싱가폴을 3주간 다녀오며 계절의 차이에 따른 적응으로 좀 애를 먹었었다. 

올 크리스마스 최고의 선물, 지인이 농장에서 직접 가꾼 여름 야채와 과일들 한박스를 아침에 직접 들고 오셨다. 가운데는 당나귀 당근.
손가락만한 애호박은 꽃과 함께 팬에 살짝 지져 먹었다. 비트루트는 날것을 갈아 스무디를 만들면 시원하고 달콤하다.
유기농이라 모양은 울퉁불퉁 하지만 거칠고도 단단한 자연의 모습과 맛이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껍질채 먹는 스노우 피와 완두콩을 날로 먹으면 와그작 씹히며 달콤한 쥬스가 터져 나온다. 야채가 이리도 달다니..

호주를 떠날 즈음 9월의 이곳은 겨울의 끝자락에 있었다. 8월이 지났으니 겨울을 넘겼다고 보아야 하지만 서늘하고 으슥한 겨울 날씨는 늘 그렇듯 한동안 이어졌다. 한국은 주로 5-6월 경 봄이나 초여름에 방문했던 터라 근 20년 만에 한국의 가을을 느껴볼 생각에 설레었다. 예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얇은 긴팔 옷과 가디건 등을 챙겼다.  

호주는 아직 겨울이었으므로 외투를 입고 멜번 공항을 향했고 그대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한국은 아직 여름이었다. 가을 기운은 느껴볼 새도 없이 무더위가 이어졌다. 트렁크의 긴팔 옷은 꺼내지도 못하고 80대 노모의 여름옷을 빌려 입고 열흘을 보냈다. 기후 온난화 문제인가? 내가 감각을 잃은 건가? 푹푹 찌는 더위가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더 더운 싱가폴 시댁으로 향했다. 찜통 같은 동남아 더위에 늘 밤잠을 설치고 대낮에도 축 늘어질 만큼 힘들어했던 터라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엔 달랐다. 꽤 견딜만했다. 아침저녁으론 시원하기까지 했다. 그동안은 큰 시누이의 집에서 주로 머무르곤 했는데, 이번 여행엔 작은 시누이 집에서 머물렀다. 그게 이유인가? 아닌가? 난 몇 번이고 물었다. 왜 예전보다 덜 더운 거지? 나만 그런 거야? 아님, 나라 전체가 덜 더워진 거야?? 

그렇게 열흘을 보내고 호주로 왔는데 당연하게 생각했던 봄이 와있지 않았다. 떠날 때와 마찬가지의 겨울 날씨가 이어졌다. 여행짐을 풀고 일상을 시작하고 며칠이 지나도록 싱숭생숭했다. 몸이 피곤한 것도 지나갔고 마음이 수선스러운 것도 아닌데 일상이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이것은 무엇일까?

그러던 어느 주말 햇살이 따뜻하던 오후, 아들이 농구 연습을 하는 옆동네에서 잠시 산책을 하다가 불쑥 깨달았다. 이 사과나무 아래서..

난 계절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였다. 만개한 사과나무 꽃을 보고 따사로운 봄볕을 쬐고 푸르른 풀밭을 걸으며 갑자기 '봄이 왔구나!' 느꼈다. 조금씩 삐걱대던 리듬을 어느 박자에 맞추어야 할지 알게 됐다고 해야 하나...

이젠 그냥 봄으로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를 인정하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거리를 가득 채운 장식을 즐기고 해마다 거실에 트리를 세우면서도, 온갖 크리스마스 행사에 참여하고 카드를 보내고 선물을 주고받고 성탄 예배를 드리고, '메리 크리스마스'를 수도 없이 외치며 온갖 캐럴을 다 불러도 돌아서면 느꼈다. 이건 크리스마스가 아니야! 

한 여름 뜨거운 햇볕아래  바닷가나 공원에 모여  물에 뛰어들고 피크닉을 하고 더위를 피해 휴가를 떠나는 이 생경한 크리스마스 풍경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나.. 그런데 한국은 물론이고 유럽이나 북미에서 온 여러 북반구 이민자들을 만나며 이들도 모두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이들은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는 그것대로 즐기고 한겨울이 되면 '7월의 크리스마스'를 따로 기념하기도 한다. 

바닷가의 크리스마스 콘서트 풍경. 이날은 쌀쌀해서 그나마 긴팔옷을 입고 있지만 보통은 수영을 하며 캐롤을 듣는다.

10년도 훌쩍 지나서 조금씩 한여름의 크리스마스에 적응이 좀 된 뒤론 감사하는 마음도 생겼다. 한국의 늦가을 즈음 11월이 되면 조금씩 우울 모드로 빠지며 '올 한 해는 한 것도 없이 지나갔구나'며 허무함에 어두운 사색의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이곳에서는 그런 감정이 생길 틈이 없었다. 한 해를 마무리해보자는 아쉬움도 새해를 시작해보자는 굳은 결심을 씩씩하게 세워볼 겨를도 없이 방학을 하고 여행을 떠나고 흥겹게 한여름을 놀며 아무 생각 없이 보내곤 한다. 절대적 시간이 아니라 계절의 변화에 맞춰 살아나가는 나의 신체 리듬이 재미있고 남반구의 사이클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러다가 가을이 오면 난데없이 우울하게 '잔인한 4월'을 보내기도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즐겁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이 외롭지 않게 평화롭게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는 크리스마스를 보내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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