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시작은 신나게 힘차게..
호주에서 한여름에 새해 맞기는 신나고도 행복한 일이다. 이전 글에서도 말했지만 여름이고 휴가를 떠나는 시기이다 보니 조용히 한 해를 정리하고 신년 계획을 세운다기보다는 일단 놀고 보자는 분위기다. 10여 년 전 스킵튼 깡촌에 살 때 그곳에서 맞았던 새해 하루의 글을 올려볼까 한다.
새해 첫날이었다. 날이 몹시 무더웠는데 장로님 가족이 오후에 계곡으로 물놀이를 가자고 초대했다. 에뮤 크릭(Emu Creek). 우리 동네를 감싸도는 작은 물줄기인데 그 상원지로 30여 킬로를 올라가다 보면 작은 폭포와 계곡이 있다는 것이었다. 개인의 목장이 있는 사유지라 주인장의 허락을 받아야만 갈 수 있는 곳이라는데 약속 장소를 어렵게 찾아가보니, 추수를 끝낸 황량한 들판 위에 누렇게 바짝 마른 건초덩이들만 여기저기 있어 도대체 물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차에서 내려 조금 걷다 보니 놀랍게도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고 이내 작은 시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내 앞에 놀라운 절경이 갑자기 펼쳐졌다. 아담한 작은 계곡은 초록 수풀로 동그랗게 둘려진 채 시원한 푸른 물이 가득했고 한쪽엔 그림 같은 미니 폭포가 있었다.
아! 세상에.. 이 메마른 땅 한가운데 이런 곳이 있다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 같지 않은가! 그곳에서 제각각 헐벗은 채 물놀이에 신이 난 한 무더기의 인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신년 모임을 위해 각지에서 모여든 한가족이었다.
장로님 맏아들은 수년 전 캐나다로 위킹 홀리데이를 갔다가 그곳에서 여인을 만나 결혼하여 몇 년을 살았고 지난해 호주로 돌아와 정착을 했다. 그런데 그 신부의 가족 20여 명이 이번 크리스마스를 맞아 대거 딸네 집을 방문했고 이후 신년을 맞아 사돈댁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이들의 사돈맞이는 참으로 소탈했다. 집이 좁은 건 아니었지만 갑자기 들어닥친 30여 명의 (객지에 나가 있던 장로님의 여섯 자녀들까지 다 모였으니) 사람들이 품위를 유지하며 잘 만한 공간이 충분치 않았는데, 이들은 아무런 고민 없이 사돈댁을 위해 뒷마당에 오래된 텐트를 치는 것이 아닌가!
동네 분들에게 캐러밴도 빌려다 끌어놓고 수십 년을 야외활동 할 때마다 써서 아주 낡은 담요들을 사돈댁들에게 배정했다. 그런데 그 캐나다에서 온 가족들도 전혀 섭섭하다거나 당황하는 기색 없이 그 잠자리를 고마워하며 어린애들처럼 순수하게 캠핑을 하고 좋아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그동안 호주와 캐나다를 서로 왕래하며 지내 잘 아는 편이라 쳐도 사돈댁인데 이리도 격식이 없이 오랜 친구를 맞듯 편안하게 친절하게 준비를 하는 것이 놀라웠다. 캐나다 가족들은 '원더풀' '환타스틱'을 수시로 연발하며 자기들이 지금 얼마나 사돈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를 알렸다.
대가족이 모이다 보니 아기들이 많았다. 5살 내 아들이 최연장 아이였고 백일이 안된 아기도 둘이나 있었다.
그래도 울퉁불퉁한 계곡과 절벽에서 무리 없이 놀 수 있었던 건 이모 고모가 열명이 넘었기 때문이다. 아빠며 삼촌들도 눈을 떼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손자손녀를 위해 고무배 두척을 장만해 바람을 넘었다. 10만 원 정도를 투자했단다. 돈을 참 쓸데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사돈댁 온다고 허례허식을 쫒는 것이 아니고.^^
으라차차! 신나는 물놀이. 따로 또 같이 수영을 하거나 다이빙을 하거나 배를 타거나 선탠을 하거나 젖을 먹이거나 애를 보면서 몹시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며느리도 딸도 사돈댁도 훌러덩 벗고 제멋대로 첨벙!! 그리고는 또 외친다. 환타스틱!
아들이건 사위건 자기 아기들을 극진히 살폈다. 백일 된 아기들과 폭포를 뚫고 들어가는 용맹스러움이라니.. 이런 건 아빠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리라.. 아니, 솔직히는 호주 엄마들도 마찬가지로 용맹스럽다. 놀랍게도 아기들은 좋다고 까르르 댄다. 이곳 아기들은 엄마의 젖을 먹고 아빠의 체온을 매일매일 일상적으로 느끼며 자란다. 어설프던 남자들도 백일 정도 지나면 아기 보기의 달인이 된다.
출산율 저하를 고민하면서 선진국의 복지 정책 어쩌고 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정말 봐야 할 본질을 놓치고 있다. 아빠가 아빠의 자리에서 아빠 노릇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잘못된 사회 문화부터 제거해야 한다. 일상이 사회가 직장생활 위주로 돌아가 가정이 쓸데없는 희생을 하다가 마침내는 제 기능을 포기한 채 파괴되고 온갖 사회적 문제를 분출해내는 화산이 되고 마는 슬픈 현실들. 음.. 얘기가 잠시 삼천포로...
오늘의 요지는 아들 손자 며느리 사돈댁이 모여 형식이나 겉치레 따위와는 거리가 먼 즐겁고 유쾌한 모임을 하며 새해를 맞더라는 것이었다.
늦저녁의 따가운 햇살로 바위들이 한참 뜨거워졌을 무렵 누군가가 외쳤다. 캐나다 시간으로 새해가 시작된다며 카운트 다운을 다시 하자고. 그래서 다 같이 소리 질러 외치며 캐나다의 새해를 맞고 또다시 다이빙을 첨벙! 첨벙! 늦은 여름해가 다 기울도록 물놀이는 이어졌다.
이 대가족들은 저녁으로 무엇을 먹으려나..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은 최소화하고 (그렇다고 굶주리는 것도 아니다.) 즐겁게 노는 것에 집중하는 호주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랄까.
어쨌든 마을 깊숙한 곳에 이렇게 멋진 비밀의 계곡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크게 부자가 된 것 같았다.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아직도 환한 밤 8시쯤 집에 오다. 떡국은 커녕 남은 찬밥 따위로 저녁을 때웠지만 그래도 행복했던 새해 첫날이었다.(2012/01/02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