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아들이 며칠 전 운전면허 시험을 통과했다. 땅이 넓고 대중교통이 부족한 호주에서는 많은 청춘들이 18살이 되자마자 면허 시험에 도전한다. '아이가 또 이렇게 한걸음 성장해 나가는구나' 뿌듯함을 느끼며 아들이 VIC Roads (도로관리와 면허를 주관하는 기관)에서 받아 온 여러 브로셔를 훑어보다가 섬찟 놀랐다.
축하한다는 메세지와 여러 안내서 사이에 끼어 온 '10대들의 교통사고를 염려하는 모임' (TRAG-Teenagers Road Accident Group)의 경고가 살벌했기 때문이었다. 이 단체의 웹페이지를 찾아보니 사연은 대략 이랬다. 호주에서 10대 사망 요인의 1위는 교통사고란다. 루쓰와 스카이란 두 소녀는 1998년 각기 다른 차 사고로 10대의 오빠를 잃었다. 우연히 만난 둘은 가족을 잃은 아픔을 나누고 위로하다 친구가 되었는데 사고 후 자신과 전 가족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10대 초보 운전자들이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를 여러 사람들과 나눌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동네의 작은 모임에 강사로 나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감명받은 동네 소방청장이나 응급구조사, 주민들이 조금씩 힘을 보태면서 이 소녀들의 나직한 목소리가 동네에서 지역으로 점차 퍼져나갔다.
그렇게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지금은 모닝턴 지역의 전 고등학교를 돌며 '안전운전 교육 프로그램'을 강의하는 단체로 발전했고 운전면허를 취득하는 모든 청소년들이 빠짐없이 그들의 사연을 들을 수 있도록 빅로드와 함께 일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10대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뉴스에서 듣던 남의 얘기가 아니라 동네 모퉁이 매일 다니는 도로에서 벌어진 사고로 이웃의 누군가가 죽었고 남은 가족들이 어떤 고통 속에서 사는지를 들으니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혈기에 들떠 운전대를 잡으려던 순간 들은 소녀들의 외침은 얼마나 시의적절한가!
죽은 자는 말이 없고 힘이 없고 생명이 없다. 그러나 살아있는 자들이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세상이 달라지기도 한다. 외마디 비명으로 사라졌던 죽은 자의 목소리가 서서히 힘을 모아 연대하고 증폭된 목소리로 사회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외칠 수 있게 된다. 유방암으로 언니를 잃은 지인 가족은 해마다 때가 되면 케잌을 구워 팔아 모은 얼마간의 돈을 암연구 센터에 기부한다. 성범죄 희생자로 힘든 삶을 살던 어느 여인은 재산의 상당 부분을 범죄희생 유가족 모임에 기부했다. 자신의 장례식에 모인 추모객들에게도 부디 꽃이나 카드대신 그 단체에 기부를 해달라는 당부를 유언으로 남겼다.
호주인들은 사는 동안 다양한 기관이나 단체에 봉사나 기부를 하는데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추구하거나 기여했던 가치로 다음 세대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장례식에 가보면 고인이 어떤 성공을 하고 지위에 올랐던 가를 이야기하기보다는 평생 어떤 단체를 지원하며 시간과 노력, 자본을 들였는지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장례식에서 만난 고인들은 동물 애호가도 있었고 미래의 환경을 염려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지역 사회 어린이들의 교육에 마음을 쓰기도 했다. 죽어서도 동네 도서관에 신간을 구입해 채워 넣는 사람, 낙후된 공원 시설을 고쳐놓는 사람, 장애자가 다닐 수 있는 산책길을 만드는 사람 등등.
살면서 경험했던 어려움이나 개선 사항 혹은 이루고 싶었던 일들을 사는 동안 다 해결하지 못했을 때 과연 누가 어느 단체가 나의 뜻을 이어 대신 일해줄까를 고민하며 사후의 미래까지 설계하는 것이다. 그렇게 추구하던 가치와 의미를 연장시키고 확대해 놓은 이들은 살아있는 누군가가 그 일들을 실행하는 것을 보며 사후에도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