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기 Oct 08. 2024

호주, 공동체가 함께 묘지를 관리하는 이유는?

죽은 이웃도 이웃이다.

15년 전 즈음, 인구 500명이 사는 작은 시골 마을 스킵튼에 살았었다. 그곳에서 묘지관리 봉사를 했던 추억이 있어 나눠볼까 한다. 마을 사람들이 여러 동호회를 만들어 스포츠나 봉사, 취미 활동을 함께하고는 했는데 그중에 하나가 스킵튼 히스토리칼 쏘사이어티(Skipton Historical Society)라는 단체였다. 우리말로 하면 '향토 역사 연구회'쯤이 될 듯하다. 호주 전역에 지부가 있을 만큼 유서 깊은 클럽인데 역사에 관심 있는 주민들이 모여  마을 역사를 발굴 기록 정리 보존하는 등등의 일들을 찾아서 했다. 

가로 세로 자로 재고 본드로 현판을 붙였다.

어느 날인가 이 모임에서 낡은 묘지에 새 현판을 안치한다고 해서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따라가 봤다. 호주의 여러 마을이 그렇듯 스킵튼에도 마을 한가운데에 공동묘지가 있는데 유족들이 돌보지 못하는 묘지 중 두 개를 새로 단장한다는 것이었다.


아일랜드에서 오신 이 동네 장로교회 초대 목사님은 1858년 29세의 나이에 말에 끌리는 사고를 당해 30 시간 뒤 사망했으며 부인은 이후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짧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당시엔 유럽에서 배를 타면 몇 달 동안 험난한 항해를 해서 어렵게 호주로 왔다는데 낯선 이국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로 남편을 잃은 젊은 아내는 그 먼 길을 홀로 어찌 돌아갔을까.


또 다른 한 명은 돌담을 짓는 장인이었다. 지금도 마을 곳곳엔 제주도 돌담과 비슷한 구멍 숭숭한 검은 돌을 쌓은 담들이 있는데, 이런 돌담을 짓던 마지막 장인이었단다. '그의 인생작은 수십 마일의 돌담으로 지금도 살아있다.'고 적은 현판을 붙인 뒤 회원 중 누군가가 1964년 마을 신문에서 발췌했다는 그의 삶에 대한 기사를 담담히 읽었다. 생각하기에 따라 그냥 단순 노동자로 볼 수도 있는데 말이다.


대단한 추모나 형식은 없었다. 그야말로 역사를 다루는 차원에서 마을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담백하게 되짚어 본다는 정도였다. 피도 섞이지 않고 안면도 없는 이들의 묘지를 취미로 살핀다는 것과 지역 카운실(구청쯤)에서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며 묘지를 함께 관리한다는 것이 새로웠다.


일을 마치고 다 같이 공동묘지를 둘러보았다. 작은 시골 마을이다 보니 몇 대가 한자리에 묻히는 경우도 있고, 마을 사람들인지라 이 사람은 어디서 살던 아무개고 저 사람은 어떻고를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묘지엔 저마다의 사연이 있어 그 짧은 묘비명 앞에서도 참 많은 사실을 알아내고 상상할 수 있었다.


가령 어떤 남자의 묘지엔 두 명의 아내가 나란히 묻혀 있었는데, 과연 이들은 무덤 안에서 편안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말에서 떨어지거나 끌리거나 밟혀 죽은 사람도 있었는데, 당시 교통수단이 말이었던 걸 감안하면 요즘의 교통사고겠구나란 생각도 들었다. 또 열병으로 한가족이 일시에 몰사해 묻힌 경우도 있었고, '나의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좋은 엄마'로 기록된 여인은 고작 30대 초반이었다. 그럼 난 그때부터 그 남편과 아이들의 이후 삶은 어땠을까를 그려보게 됐다. 

다른 회원들이 걷다가 가끔씩 서서 나누는 얘기를 들어보면 '이 친구가 백혈병으로 27살에 죽었을 때 얼마나 놀랬는지. 이 친구 부모가 마을의 유지였는데, 그 많은 돈으로도 자기 젊은 아들 하나를 구하지 못하더라고..'라는 대화였다. 묘지 사이를 걷는다는 건 생각보다 흥미롭고 삶을 사색하게 한다.

 




그렇게 산책을 하고 나니, 연구회 회장님이 커피를 마시자며 묘지에서 좀 떨어진 마을 박물관으로 초대를 했다. 그녀는 박물관장이기도 했다. 수 십 년째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단계라 공식적으로 오픈을 한 것은 아니고 개별적 요청이 있을 때만 문을 여는 초미니 동네 박물관엔 무엇이 있을까? 


한때 마을의 법원으로 쓰였다던 코트 하우스(Court House)는 각종 사진들과 자료들 가구나 피아노 등이 가득했다. 이 박물관에서 역사 위원회 회원들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면서 마을의 유적지 보수도 하고 (안건을 만들어 지자체에 제안하며 후원도 받는다.) 마을 사람들과 관련된 도서 신문 자료도 모으고, 유가족이 기부한 물건들을 시대별로 정리도 한다. 


관장님은 가이드가 되어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셨다. 150년 전 세워진 마을회관 건립 위원회의 위원들과 활동들, 마을 조기 축구회의 경기 전적과 선수들 명단, 마을 유적지, 이장 명단, 동네 교회 목회자들, 이 마을 출신 유명인사들과 족보, 새 건물이 들어선 시기, 허물어져 사라진 건물 등등 이 마을에서 살다 간 사람들의 다양한 행적들이 있었다. 죽은 자들의 온갖 유품과 기록들이 쌓여있었다. 모아놓은 자료들을 살피다 보면 100년 훨씬 이전에 있었던 사건이 내 앞에서 펼쳐지고 당시의 인물이 살아 걸어 나오는 듯했다. 저 모퉁이 건물이 이렇게 지어졌던 거구나, 이 동네 노인들 어릴 땐 이러고 살았네, 저렇게 펄펄 뛰며 축구를 하다가 지금은 묘지에 누워있군, 이 사람 성을 보니 옆집 아무개랑 연관이 있나 보다 등등. 그야말로 His story 혹은 Her story가 아닌가. 역사 속 그 시절 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스며 들어왔다. 


이 마을 사람들은 죽어도 외롭지 않았다. 초라한 묘지를 단장해 주는 이웃도 있고 그들의 평범했던 삶의 이야기를 관심 있게 끌어내고 사라지지 않도록 역사의 한 부분으로 기억해 주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있으니 말이다. 이들에게 죽음은 가족과 핏줄 안에서 얼마간 자리 잡았다가 잊혀지는 것, 꺼져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과 엮여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였다. 모든 개인의 인생과 죽음도 혈연 중심의 가족 안에서만 잠시 기억되다가 소멸하는 것이 아닌 한 시대를 함께 살았던 공동체 안에서 아름답게 엮이고 꼬이기를 소망해야 하지 않을까!


여느 집 거실만큼이나 작은 공간이었지만 지금까지 가본 그 어떤 으리으리한 박물관보다 친밀하게 다가왔던 공간이었다.  나도 그때는 그 마을에 속해 나대로의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었기에 느끼는 감정이었으리라.



관장님(완쪽)과 클럽 회원들과 전시실에서 차 한잔 마시며 흘러간 시간과 인생을 논하다.

법원에서 법관들이 재판에 앞서했다는 맹세. 맡은 의무를 최선으로 임하겠으며 항상 다른 사람을 돕고 법을 준수하겠다고 하나님과 여왕 앞에서 서약했다. 잉크를 묻혀 손으로 꾹꾹 눌러썼다. 오늘날에도 뭔가 서약을 하려면 이 정도 노력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말끔하게 자판을 쳐서 프린터로 뽑기보다는.

유족들은 유품을 정리하며 버릴 것은 버리고 쓸만한 것은 중고가게에 기부하고 소장할만한 물품들은 마을 박물관등에 기증한다.

골동 회전의자에 앉아 신이 난 어린 아들. 하지만 박물관이 정식으로 오픈하면 이런 안내문이 붙을 것이다. '손대지 마시오!''앉지도 마시오!!''보기만 하시오!!!' 


이전 07화 호주, 간병을 감당할 관계의 범위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