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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Oct 01. 2024

호주, 간병을 감당할 관계의 범위는?

마음에 여유가 있으면 주변이 따뜻해진다. 

C는 70을 넘긴 나이가 무색하게 활동적이고 자기 의견을 당당히 주장할 줄 아는 모던 여성이었다. 작은 두상과 짧은 쇼커트 백발 머리, 동그란 안경을 낀 외모는 별로 꾸미지도 않고 멋을 낸 것도 아닌데 세련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런 모습에 반했던 걸까. 그녀가 이혼 후 만난 파트너 D는 무려 10살도 넘게 연하였고 C가 벌이고 다니는 일들을 군소리 없이 옆에서 거들고 조용히 수습하는 다정한 성품의 남자였다. 서로 정반대의 성격이었지만 참으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 커플이었다. 


늘 밝고 적극적인 C였기에 전남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놀랐다. 이혼으로 깨진 결혼이었으니 남편이 뭐 그리 좋았겠는가 만은 그가 알코올 중독에 가정폭력을 일삼는 나쁜 남자였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당차고 자기 할 말 다하고 사는 C인데 왜 그 가정을 지키려고 오랜 세월 참고 애썼을까? 4명의 자녀 때문이었을까? 그 남자가 불쌍해서였을까? 

이들은 이혼을 한 뒤로도 한 동네에서 살았다. 호주의 많은 이혼 부부들은 이혼 후에도 가까이 사는 경우가 많다. 멀리 이사해 새 출발을 할 것도 같지만, 직장 문제도 그렇고 자녀 양육도 분담하다 보면 오히려 한쪽이 이사를 갈 때 나머지 한쪽도 따라서 같은 동네로 이사를 가기도 한다. C와 전남편도 그랬으리라. 자녀를 같이 키웠고 하던 일도 지인들도 다 그 언저리에 있으니 이혼 후에도 은퇴 후에도 내내 한동네 사람으로 살아온 것이다.


C와 D가 전남편 간병을 함께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알코올 문제가 있는 노년의 독거 남자가 건강을 얼마나 잘 챙겼겠는가. 이런저런 고질병을 달고 살던 그는 점차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졌다. 이렇다 할 가족이라곤 네 자녀일 텐데, 타지에 나가 사는 두 자녀는 어쩌다 한번 만나기도 힘들었다. 가까이 사는 아들은 약간의 장애가 있어 제 한 몸 돌보기도 벅차고 막내딸은 워킹맘에 어린 두 자녀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다.


인정 많은 C는 결국 간병을 자청했다. 전남편을 차에 태워 병원을 다니는 일이 시작이었다. 덩치 큰 남자를 70대의 C가 홀로 부축하기엔 너무 무거웠고 D까지 합세하여 거들게 되었다. 얼마간 병원을 다니면 회복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손 가는 일은 많아졌고 이들의 시름은 깊어졌다. C의 마음이 특히 복잡했을리라. 나를 괴롭혔던, 그래서 관계를 끊어냈던 남자를 말년에 돌보게 될 줄이야. 게다가 아무 상관없는 D까지 끌어들여 짐을 지게 만들었으니... 그러나 D는 착한 남자였고 모든 수고로움을 묵묵히 감수했다. 그렇게 한 팀을 이루어 몇 년을 간병했고 전남편은 어느 날 별말 없이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C가 한순간 판단의 실수로 제 무덤을 제가 판 거였을까, 그냥 손 빼고 나오면 적절한 복지 시스템 안에서 그럭저럭 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간병을 나섰던걸까? 전남편에게 그래도 남은 약간의 우정이라고 봐야 하나, 모르는 남도 돕는 마당에 그래도 좀 아는 인간이니 돕고 보자는 인류애일까, 딸이 짊어지는 게 안타까워 대신 나선 모성애일까, 그 마음을 정의해 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얼마 전 치매를 앓는 브루스 윌리스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기억을 잃어가는 그의 생의 마지막 장을 함께 하기 위해 전부인 데미 무어가 현부인과 합세해 함께 간호하고 한가족처럼 시간을 보낸다는 이야기였다. 예전 같았으면 가정의 경계를 넘나드는 관계의 개방성에 놀라 '정말 할리우드 배우답군' 하고 지나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서인지, 한때의 애증으로 철벽을 치지 않는 이런 마음들이 오히려 인간적으로 느껴지며 따뜻하고 아름답게 다가왔다. 오지랖이 넓은 것도 아니고 인정이 헤픈 것도 아니고, 돌아볼 여력이 있으면 또 힘 닿는데로 끌어안고 나누며 사는 삶이 성숙한 노년의 여유가 아닐까. 손절과 미니멀한 관계정리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이혼 재혼이 흔해 가족 관계가 복잡해지고 수명도 길어지다 보니 이런 복잡다단한 문제들도 늘어간다. 이에 대한 인간의 마음도 관계의 범위도 유연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 듯 하다. 한 인간의 인간다운 삶, 존엄한 죽음에 초점을 맞추면 시끄럽고 처절했던 과거사도 한 챕터로 그냥 넘길 수 있는 것도 같다. 


간소하게나마 장례까지도 다 치른 뒤 C와 D는 홀가분하게 유럽으로 긴 여행에 나섰다. 힘겨운 프로젝트를 함께 잘 마친 커플의 얼굴엔 활짝 웃는 미소가 다시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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