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를 산책하다 생긴 일.
오늘도 변함없이 산책에 나섰다. 지난 10년간 집에서 가까운 뒷바다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옆으로 확장해 가며 다른 구간을 걷다 보니 어느덧 모닝튼 반도 남부 지역 해안가 산책길을 거의 다 걸어 본 듯하다.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니고 완주 도장을 찍어주는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뿌듯하다. 해안가의 모든 산책길을 상세히 안내하는 두꺼운 책자도 있는 만큼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각 구간들을 빠짐없이 걸으며 나름의 성취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매일 같은 듯 매일 다른 것이 자연이다. 같은 파도가 몰려온 적이 없고 단단한 갯바위는 조금씩 갈리고 뜯겨 나간다. 같은 물에 발을 담글 수 없듯이 같은 모래를 쥐어 볼 수도 없다.
그래서 10년을 걸어도 지루하지 않다.
심지어는 깜짝 놀랄 일도 때마다 많다.
이 날은 죽은 바다사자를 만났다. 물개의 사촌쯤 되지만 덩치는 훨씬 크다. 배를 타고 나가면 멀지 않은 작은 바위섬에 펭귄 물개 바다사자들이 모여사는 군락이 있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와서 죽어 누운 건지 모르겠다. 이쪽저쪽 살펴보며 나름 추리해 본다. 물속에서 어떤 사고로 급사해 뭍으로 떠밀려온 것일 수도 있고 급류를 잘못 타서 뭍으로 밀려온 뒤 바다로 돌아가지 못해 죽은 것일 수도 있겠다.
사진을 찍어 집에 있는 사춘기 아들에게 보냈더니 호기심에 먼 길을 총알처럼 달려왔다. 뭉기적대며 같이 산책 나오기를 거부했었는데, 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고맙다, 죽은 바다사자여!
아들은 석양을 배경으로 바다사자와 셀카를 찍은 뒤 SNS에 올렸다. 캡션은 '얘들아, 선크림을 잘 바르자!' 조회수 폭발..ㅎㅎ
한국의 친구와 가족에게도 보냈더니 '아이고, 불쌍해서 어쩌나'란 감성적 대답부터 '집이 동물원이냐, 웬 바다사자?'란 놀람부터 '이 사체는 누가 치우냐'는 현실적 걱정까지 다양한 반응이 돌아왔다. 덩치가 크지만 이 정도라면 파도에 곧 쓸려나갈 것이다.
몇 해전 큰 고래가 밀려와 죽었을 때는 좀 심각했다. 며칠이 지나도록 큰 파도가 일지 않았고 사체가 육지에서 그대로 부패하면 위생과 환경 문제가 따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힘으로 치우자면 동원해야 할 인력과 장비와 비용이 너무 커져 지역 카운실이 큰 부담을 떠안게 될 터였다. 다행히 며칠 뒤 큰 파도가 일어 고래 사체를 쓸어갔고 마을 사람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호주 바닷가에서는 이런 일들이 종종 생긴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모래 언덕에 누군가의 거친 솜씨로 만들어진 밴치가 놓여 있었다. 'THE OFFICE'. 매일 출근해 앉아 바다를 내려보며 뷰를 즐겼다는 소리인가. 이곳이 사무실이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을 것이다. 3년 전 죽은 잭이란 남자는 이 산책길을 30년 동안 걸었단다. 괜찮은 인생을 살다 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