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는 다가오는데..
며칠 전 월요일 멜번 시내를 다녀왔다. 왕복 3시간 거리인지라 멜번을 다녀올 땐 이른 시간에 집을 출발하는 게 보통인데, 이 날은 점심도 다 먹고 느긋하게 있다가 갑자기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러 가자는데 마음이 동해 남편과 즉흥적으로 4시쯤 집을 나섰다.
이즈음엔 상점마다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트리와 장식을 한껏 꾸며놓아 볼거리도 많고, 방학을 맞은 가족들이 몰려나와 라이트 쇼도 보고 선물 쇼핑도 하느라 멜번 시내 어디를 가도 북적북적하기 마련이다. 불빛쇼는 어차피 밤에 시작하고 여름해가 길어져 8시가 되도록 환하니 지금 나가서 저녁을 먹고 둘러봐도 시간이 충분할 듯했다.
집을 나서고 나서야 갑자기 어제 시드니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이 떠올랐다. 마음이 심란해서 뉴스를 끄고 지내다가 일상으로 인해 잠시 잊어버린 것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제 발로 찾아가는데 좋은 일일까?' 우려가 됐지만 그런 게 두려워 하고 싶은 일을 안 한고 싶지도 않았다. 남편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했다.
그렇게 도착한 시내는 평소와는 다르게 너무도 조용했다. 저녁 시간이라 그런 건가? 사람들이 다 퇴근을 해서 그런 건가? 테러 사건의 여파가 이렇게 큰 건가?
중심가에 있는 마이어 백화점에 갔다. 쇼윈도를 통해 보는 크리스마스 특별 전시는 수십 년간 이어져 오는 전통으로 해마다 새로운 주제로 멜번인들을 끌어모았다. 온 가족이 손을 잡고 모여 몇 시간씩 긴 줄을 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기다리며 보는 전시였다. 아들이 어릴 땐 해마다 나왔었는데 기다림에 지쳐 몇 번씩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던 건 그래도 봐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의례도 아들이 성장한 이후론 뜸해져 지난 2년간은 나 혼자 와서 봤던 것도 같다.
그나마 약간의 줄이 있었지만, 서자마자 움직이기 시작해 4-5개의 윈도 속 전시와 이야기를 곧 즐길 수 있었다. 올해는 크리스마스 명절을 앞두고 카드를 전하고 선물을 포장하는 복고적 우체국 이야기를 레고로 만들어 놓았다. 모든 공정을 로봇이나 기계가 대신하는 시대에 이런 우체국 풍경은 정말 동화 같은 옛이야기로 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멜번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또 다른 크리스마스 행사는 시드니 마이어(도시가 아니고 사람 이름이다.) 뮤직볼에서 열리는 야외 음악회이다. 호주 유명인들이 총망라 등장해서 캐럴을 부르는 무료 라이브 방송인데 크리스미스 이브엔 가족들이 모여 현장에서 혹은 티브이로 이 음악회를 보며 손에 촛불을 들고 캐럴을 같이 부른다. 멜번에 살 땐, 피크닉 가방에 먹을 것을 챙겨 와 저 푸른 잔디밭 위에 지인들과 모여 앉아 도시락도 까먹고 지는 해도 바라보고 밤늦도록 캐럴도 들으며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흠뻑 빠지곤 했었다. 한여름에 크리스마스를 맞는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느끼며...
이런저런 장식들을 돌아보며 들뜨지 않은 조용한 거리를 산책하듯 걸었다. 계획에 없던 미미한 쇼핑을 하며 대목을 이렇게 보내는 소상공인들의 마음은 어떨까 걱정도 조금 해보았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북창동 순두부집'이었다. 저녁을 이곳에서 먹기로 이미 작정하고 나왔기에 베트남 쌀국숫집도 뭐도 다 지나치고 왔다. 돼지 순대국밥도 시켜 보았다. 즐겨 먹는 메뉴는 아니었지만 고춧가루를 잔뜩 뿌려 밥까지 말아 후루루 떠먹자니 왠지 옛 생각이 났다. 근 30년 전 광화문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북창동에서 꽤 자주 무언가를 먹었었다. 식당 이름도 메뉴도 기억에 없을 만큼 오래전 일이고 흔했던 음식이었으니 감동 없이 먹었을 테지만..
세월이 흘러 나는 멜번 한복판 한식당에서 북창동이란 지명과 순두부란 메뉴에 홀려 국물까지 박박 긁어먹고 다음엔 아들도 데려오자, 친구 아무개도 초대해 보자며 다음 방문을 기약한다.
타운홀엔 미디어 파사드라 할만한 라이트쇼가 매일 밤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날은, 테러 희생자를 기리는 의미에서 취소되었다. 붉은 리본으로 장식된 건물을 보자니 또 옛 생각이 난다. 호주에 왔던 첫해 일을 마치고 거리를 걷던 어느 날 밤, 별안간 눈앞에 펼쳐진 난데없는 쇼에 뒤통수를 맞은 듯 놀란 적이 있었다. 무슨 페스티벌 기간이라 하였지만 정보에 어두웠던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이 유려한 건물의 외벽을 무대 삼아 배우들이 벽을 기어 타고 오르내리며 행인들을 관객 삼아 뮤지컬 공연을 하는 것이 아닌가.
가족의 반대로 헤어진 연인이 세레나데를 부르자 창문이 열리고 여인이 나타난다. 그들이 달콤하고 애닮은 사랑을 노래하는 사이 어디선가 정적이 나타나고 이들은 칼을 휘두르며 멋진 결투를 벌이기도 했다. 화려한 조명으로 건물은 별별 모습으로 바뀌는데, 배우들은 벽을 타고 창문을 오가며 완벽한 무대를 만들어 과연 이것이 꿈인지 환상인지 헷갈릴 정도로 입을 벌리고 봤었던 것 같다.
머릿속의 추억들과는 달리 여기저기 불 밝힌 트리와 장식들이 어색하고 썰렁했다. 어쩌자고 무고한 사람들에게, 어린아이에게까지 총을 쏜 것일까. 크리스마스가 낼모레인데 왜 이런 분위기가 되어 버린 걸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 2천 년 전 크리스마스는 어쩌면 이런 분위기에 가깝지 않았을까란 생각도 든다. 흥청망청 화려한 성탄은 아니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임신한 몸으로 행정관리 차원의 인구 조사에 응하고자 긴 여행에 나섰다가 방을 잡지 못해 마구간에서 해산을 하고 아기 예수를 구유에 겨우 눕혔다. 동방박사의 예방을 받아 선물을 받기도 했지만, 이후 헤롯왕이 '두 살 이하의 아기를 죽이라'는 명령에 위협을 느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난민으로 주변 지역을 떠돌며 살았다.
그때로부터 세상은 많이 변하지 않은 것도 같다. 지금도 전쟁이나 분쟁으로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난민들이 세상엔 가득하고, 자신들의 삶의 터전과 이념을 지켜 내겠다고 폭력을 일삼는 테러범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수시로 등장하고, 권력에 눈이 멀어 국민에게 총을 들이대는 대통령도 여전히 있는 것이다.
이번 크리스마스엔 정말로 구세주가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되새겨 봐야 할 듯하다. 죄 많은 인간들로서는 도저히 스스로 풀 수 없는 영역의 일들을 절대자에게 아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낮은 세상을 내려보고 눈물 흘리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성탄절 본연의 의미라는 것을 깨달은 외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