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모이는 명절 풍경은?
호주의 크리스마스는 가족들이 모이는 최대 명절이다. 이민자인 우리 가족은 교회 지인들과 보내기도 했고 조용히 가족끼리 여행을 떠나기도 하며 조촐하면서도 차분한 크리스마스를 주로 보내왔다. 올해는 19살 아들의 여자친구 가정으로 초대를 받아 처음으로 양가 부모들이 상견(?)을 하게 되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아들과 여친은 가족들을 위한 선물 쇼핑으로 분주해졌다. 우리 가족들은 실용적인지라 대체로 미리 필요한 것들을 묻고 사주는 편인데 아들은 이미 우리 부부에게 카시트 커버를 온라인으로 주문해 놓았었다. 우리도 아들이 원하는 어항(?)을 사라고 현금을 준비해 놓은 정도였다. 그러니 따로 번잡하게 쇼핑을 할 것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여친 가정은 대부분의 호주인들이 그렇듯 이런저런 선물을 사서 꽁꽁 감추고 당일날 서프라이즈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12월 동안 그녀가 쇼핑한 것들이 자꾸만 우리 집 아들방에 쌓여갔다.ㅎㅎ
아들이 이브날 그녀에게 가져갈 달콤한 무언가를 만들겠다고 하더니, 이런저런 재료들을 사 왔다. 유튜브를 찾아가며 아들과 머리를 맞대고 꽁냥꽁냥 이 유치한 과자를 만들자니 웃음이 나왔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하긴 명절 전날엔 맛난 걸 만드는 게 정상이지..
나도 이 낯선 상황이 이상하게 긴장도 되고 기대도 되어서 이미 내일 들고 갈 선물을 한 바구니 포장해 놓기는 했다. 한인 식품점에서 고추장, 불고기 양념, 김, 스낵 등등을 사 왔고 이곳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때 먹는 절인 과일 케잌과 숏 브래드 비스켓, 브라우니 초콜릿 등등을 꾸려 놓았다.
크리스마스날, 두 가정이 마침내 만났다. 포옹과 키스가 이어지는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한가득한 거실의 테이블엔 아침부터 그들 가족끼리 주고받은 선물들로 덮여있었다. 이번엔 두 가족이 서로 선물을 주고받고 뜯어보고 고마움을 전하느라 한동안 떠들썩했다.
아들과 여친이 단데농 산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두 엄마를 위해 차를 한 봉지씩 사고 내게는 찻주전자를 여친 엄마에게는 예쁜 화분을 샀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를 했다니, 그 마음이 어여뻐서 뭉클했다.
점심을 먹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식탁에 앉으면 우선은 봉봉이란 폭약을 터뜨려야 한다. 옆사람과 한쪽씩 끝을 잡아당기면 딱 소리가 나면서 그 안에 있던 얇은 종이로 된 모자와 자잘한 소품, 농담이 적힌 작은 종이가 나온다. 모자를 쓰고 농담을 서로 읽으며 웃는데, 아재개그식의 언어유희가 담긴 우스개 소리라 나는 이해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기도 하고 뭔 소린지 모를 때도 많다.
크리스마스엔 첫 코스로 해산물을 먹는다. 생굴과 찐 새우를 먹었다. 태국식 소스를 곁들인 굴이 신선했다. 두 번째 코스는 육류와 샐러드를 먹는데 한여름에 크리스마스를 맞는 호주에서는 차가운 햄을 먹는 경우도 많다. 이날은 오렌지 꿀 소스를 뿌려 두 시간 구운 돼지 넓적 다리 햄을 먹었다.
우리들의 대화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희한하게도 그들과 우리 부부는 닮은 점이 많았다. 비슷한 나이에 결혼을 하고 이웃한 동네에 이사를 오고 아이를 낳고 같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여행과 캠핑, 자연과 독서를 좋아했다. 부인이 뉴질랜드에서 이민을 온 것도. 해산물을 좋아하는 식성도.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둘러앉아 보드게임을 했다. 가족오락관에서 하는 게임 같은.. 카드에 적인 영화나 팝송 제목을 말없이 몸으로 설명하면 알아맞추는 식이었다. 호주에서는 놀랍게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이들이 아날로그식 보드 게임을 하며 논다. 하긴 한국의 고스톱도 보드게임의 일종이라 할 수도 있겠다. 판돈만 걸지 않는다면.
깔깔 웃으며 대화를 나누다 피곤했는지 이 집 남편과 딸들은 돌아가며 소파와 긴 의자에 누워 낮잠을 자기도 했다. 그렇게 좀 소화를 하다가 디저트 시간이 왔다. 이 집 남편이 직접 구운 파블로바와 티라미슈, 내가 들고 간 과일 샐러드와 브라우니를 먹었다. 맞벌이를 하는 데다가 남편이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요리를 전담한다는데, 너무도 뛰어난 실력이 아닌가!
파블로바는 호주인들이 최고로 사랑하고 자부심을 느끼는 호주식 케잌인데, 러시아의 유명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가 1920년대 호주를 방문했을 때 모 셰프가 그녀에게 헌정하며 만들었단다. 계란 흰자로 만든 바삭한 머랭에 생크림과 과일을 얹어 먹는다. 하얀 발레복을 입은 발레리나가 입속에서 춤을 추며 달콤하게 녹는다.
그렇게 디저트까지 먹고 나니 놀랍게도 6시,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여름해는 길어 밖은 훤하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다음 만남을 약속했다. 아들 덕분에 좋은 사람들을 알게 됐다는 것, 오래전부터 알았던 옛 친구들을 만난 듯한 느낌, 각자의 자식이 소중해서 서로의 자식마저도 애틋한 그런 감정들이 우리를 가깝게 연결시켜 놓은 것이리라.
누가 내일을 알겠는가! 그러나 오늘은 기억에 오래 남을 감사한 크리스마스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