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한 세월 속 인류는? 고래는?
250킬로에 이르는 대남서 산책로(Great South West walk)의 걷기는 이 날도 계속되었다. 어제의 종착지였던 브릿지 워터만(Cape Bridgewater)에서 출발하여 반대 방향으로 새 길을 이어 걸었다. 프레시 워터 스프링(온천)이란 사인을 보고 발이라도 담글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절벽 아래 고래들이 놀다가는 웅덩이여서 허허 웃고 말았다. 기대와는 다른,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여행 중에도 인생을 살아가는 중에도 있지 않은가!
이날 길을 걸으며 했던 생각들은 이랬다.
며칠 전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속이 쓰렸다. 그리 심하진 않았고 오후엔 좀 나아지는 듯해 잊었다가도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쓰리다 보니 조금씩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저절로 회복되는 게 아니라면 약이라도 먹어야 되나 병원에라도 가봐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마치자면 아직도 일주일은 남았는데 집에 돌아가서 뭔가를 하기에는 좀 늦은 듯 싶었다. 그렇다고 낯선 여행지에서 클리닉이라도 가자니 허둥대고 찾는 거며 기다리는 시간이며 일일이 개인신상을 새로 적어내는 일이며가 너무 번거롭게 느껴졌고 무엇보다 소중한 휴가 일정을 그런 일도 채우며 번잡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얼마 전 폰에 깔아 둔 '제미나이' 앱이 떠올랐다. 한번 물어나 보자! 무엇보다 내가 아픈 부위가 무엇인지도 정확히 몰랐다.
인체 내부 기관과 이름을 보여 줘. 제미나이는 순식간에 병원 진료실에서 볼만한 총천연색 인체 해부도와 명칭을 보여줬다. 왼쪽 갈비뼈 밑에 분홍색 위장이 있었다. 짐작했던 대로 위장이 아픈 거였고 그 부위를 정확히 알고 나니 다음 질문이 떠올랐다. 며칠간의 증상을 얘기하며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해달라 했더니, 위산과다 등등 몇 가지 가능성을 짚어줬다. 내친김에 증상 완화를 위한 약을 소개해달라 했더니 갤포스 등 낯설지 않은 약이름 몇 개를 열거한다.
그제야 마음이 좀 놓였다. 아.. 이 정도 약이라면 부담 없이 먹어볼 만하겠다. 딱 요 정도의 도움이 필요했는데 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한글로 물어봤기에 한국을 기준으로 답을 얻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멜번에 살고 있고 거기서 뚝 떨어진 포틀랜드를 여행하고 있으니 그 약들을 이곳에서 구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런 사정을 다시 설명하고 호주 수퍼나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비슷한 약을 소개해 달라고 했더니 득달같이 호주의 수퍼 어느 곳에 가면 같은 효능의 이런저런 약을 살 수 있다고 명쾌하게 답을 해주었다.
큰 고통은 아니었지만 며칠 동안 끙끙대며 이럴까 저럴까 생각하던 문제가 이렇게도 쉽게 풀리다니 놀라웠다. 약을 먹기도 전에 심리적으로 편안해졌다. 숙소 근처의 수퍼 마켓 '콜스'에 갔더니 그 약들이 선반 위에 쪼르르 있었고, 약을 먹은 이틀 뒤 모든 문제는 깔끔하게 해결되었다.
수천 년 동안 파도와 바위가 철썩이며 부딪치고 파이고 뜯겨 나가며 기암과 해안 절벽을 빚어냈다. 그러다 어느날 또다시 화산은 터지고 용암은 흘러내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그런 사이사이로 고래는 웅덩이에서 헤엄을 치며 놀다 바다로 나아가고 인간은 작은 길을 내 걷다가 끝내 길고 긴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다.
지금까지의 자연이 세상이 인간이 충분히 놀라운데 이젠 AI기술까지 나타나 새로운 세상을 또 열겠다는 것인가! 거칠고 가파른 해안 산책로의 풍경이 숨가쁘게 아름다워 연신 사진을 찍으며 그 살아온 세월과 축적된 시간을 가늠해 보며 놀라다가 앞으로 펼쳐질 세상에 대한 만만치 않은 기대도 품어 본다. 걱정도 해본다.
이 길을 걷다가 여행자들을 간간이 만났다. 배낭에 침낭과 먹을 것까지 싸들고 이주일을 넘도록 걷는 젊은이들도 만났다. 때로는 혼자, 때로는 그룹을 지어 걷는 이들은 세상 곳곳에서 왔는지 생김새도 말하는 억양도 다양하다. 우리는 세월이 누적된 이 길을 조용히 걸으며 제각각 다른 생각에 빠져들기도 하고 또 어느 지점에서는 동일하게 풍경을 누리고 감탄을 할 것이다.
그냥 그렇게 다 같이 걸어 나가자! 또다시 화산이 터져 올라도 거친 파도가 몰아쳐도 삶은 사는 날까지 이어진다. 고래는 또 고래대로 계속 헤엄을 칠 것이다. 세상은 요동치지만 큰 바다는 잠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