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동안 같이 산 남편과 사이좋게 지내려면?

일기 07. 모국어가 좋은 사람(김창옥 교수님 강연)

by 책계일주

지난주 일요일에는 남편과 단둘이 집을 나섰다.


남편이 간절기 잠바가 없다며 플리스 잠바를 사러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이다. 온라인으로 편하게 사도 되지만 대체로 망한 경험이 더 많기 때문에 귀찮지만 매장에 같이 가주기로 했다.


혼자서는 옷도 못 사러 가는 금쪽이가 되어버린 쉰둥이 남편이다. 나는 금쪽이 남편에게 자립심을 키워야 한다며 스스로 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자식뿐만 아니라 부부간의 관계도 결국 이상적인 목표는 궁극적으로 자립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요즘은 가을이 짧아져서 '봄 여름 갈 겨울'이라고 하던데 정말로 가을이 금방 지나갈 것 같다. '갈'옷 꼭 사러 가야 하나. 음.. 곧 가을이 갈 것 같은데.



토요일 밤에는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기로 계획을 세웠다. 옷을 사러 '퍼스트빌리지'에 가는 길에 '영인산'에 가서 단풍도 보고, 아이들 사진도 찍어주고, 맛있는 것도 먹고 오자고 말이다. 현실은 남편은 아침에 늦게까지 잤고, 아이들은 완강히 따라나서지 않겠다고 했다.


봄이는 옷이 필요 없어서 안 간다고 하고, 여름이는 학원 보충수업이 있고, 가을이는 사춘기의 표본을 실천하고 있는데 그냥 머리 감기 귀찮아서 안 가고 싶다고 하고, 겨울이는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선약이 있다고 했다. 필요한 옷이나 신발도 사주고, 맛있는 식당에도 갈 거라며 꼬셨지만 아무도 넘어오지 않았다. 그랬다. 아이들은 이제 저마다의 삶이 있는 거였다.


결혼해서 같이 사는 동안 아이들 낳고 키우면서 함께 복닥거리면서 지내느라 잘 몰랐는데, 이제는 남편과 단둘이 친하게 지내야 할 때가 왔나 보다. 18년 동안 같이 산 남편과 사이좋게 지내려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김창옥 교수님이 결혼하기 전 배우자를 고를 때 모국어가 좋은 사람을 만나라고 했는데, 우린 이미 늦었다. 벌써 결혼한 지 18년이 되었다. 지금 무르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게 다 교수님 탓이다!! 교수님이 이 이야기를 18년 전에 해줬어야 하는데.. 부글부글..!!! 내 안에 부정적 자아인 셀프 텔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편도 나도 아주 다정하거나 친절한 언어를 쓰는 편은 아니어서 강의 듣는 내내 웃다가 교수님의 예시에 정곡을 찔리기도 했다. 어쩜 이렇게 모든 부부의 비밀을 알고 계신 것일까?




아무튼 단둘이 집을 나섰다. 가을 하늘은 높고, 바람은 선선하고, 볕은 따뜻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날씨였다. 1시간 남짓 걸려 '퍼스트 빌리지'에 도착했다. 이미 쇼핑하러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오늘만큼은 빨리 쇼핑하고 나오기로 약속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남편은 평소에 어두운 색 옷이 많다면서 밝은 색 잠바를 사길 원했다. 매장에 전시된 옷들도 밝은 색이 예뻐 보이고, 베이지색이나 크림색 잠바를 입은 지나가는 사람도 많이 보였다. 그런데 남편이 베이지색 잠바를 입어보자 옷이 이상했다.


'어? 이상하다. 왜 이러지? 자기야, 크림색을 입어봐.' '어? 이상하다. 자기야 그레이 색도 입어봐.' 그래도 옷이 별로였다. 다른 사람들은 잘만 입고 다니고, 마네킹에 걸려있어도 예쁜데 남편이 입기만 하면 옷이 이상했다. 매장을 여러 군데 다니면서 옷을 입어봤지만 마찬가지였다.


평소 어두운 색을 많이 입으니 블랙은 절대 안 사겠다는 남편에게 난 마지막 처방을 내린다. '자기야, 마지막으로 블랙 잠바 그냥 입어만 봐.' 남편은 본인이 입고 거울을 보면서 말했다. '진짜 이상하네. 이거 입으니까 좀 낫네.'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우리는 '나 혼자 산다'의 '전현무'처럼 멀쩡한 옷을 입어도 이상해지는 마법에 걸려서, 그나마 안 이상한 블랙 잠바를 사기로 했다. 늘 자주 입는 익숙함이 정체성처럼 된 것인지, 퍼스널 컬러가 블랙이어서 블랙이 어울린 건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나도 옷을 살 때 자꾸 블랙을 사게 되는데 우린 퍼스널 컬러만큼은 같은 걸까.


남편의 블랙 플리스 잠바, 청바지 2개, 키가 껑충 큰 가을이의 겨울 잠바 이렇게 세 가지로 쇼핑을 마무리했다. 잠바는 두 개 다 이월 상품이고, 원 플러스 원 행사하는 청바지를 샀는데도 몇 십만 원이 뚝딱이었다.


잠바를 산 매장에서 연계되어 있는 '아메리카노 2500원' 할인쿠폰을 받아서 4층으로 올라갔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사상체질 중 '태양인'인 남편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소음인'인 나는 핫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우리는 체질이 정반대였다. 그래서 좋아하는 음식도, 계절의 온도차도 다르게 느낀다는 걸 살면서 알게 되었다.


연애할 때 서로 다르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지만, 콩깍지가 씌어서 오히려 그게 매력이라 생각했는데 결혼해서 살다 보니 사소한 걸로 부딪치는 일이 많았다.



김창옥 교수님은 서로에게 '예쁜 언어'를 쓰면 부부 사이가 좋아진다고 하셨다. 대화할 때마다 원래 생각났던 말을 한 번 삼키고, 인정해 주고 이해하는 말을 하려고 노력 중이다. 그랬더니 어긋나고 삐딱했던 대화들이 조금씩 너그러워지고 주파수가 잔잔해지고 있다. 아직 더 한참 잔잔해져야겠지만..


김창옥 교수님께서 짚어주신 나의 언어습관을 되돌아보고 다르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더니 남편도 되받아치지 않고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앞으로도 남편과 계속 사이좋게 지내려면, 유머러스하면서도 통찰로 깊은 울림을 주는 김창옥 교수님 강연을 들어야겠다. 소통의 끝은 문제 해결이 아니고, '너 지금 딱 좋아, 지금처럼만 하면 돼. 실수하면 어때. 괜찮아.'라는 메시지를 담은 '예쁜 언어'라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



구름은 바람 없이 움직일 수 없고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오직 사랑이다.


김창옥 교수님께서 '레스토랑'에 가서 본 좋은 글귀라고 말씀해 주셨다.


가게 상호 이름은 '병천 순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식당에 들러 점심으로 우거지 갈비탕 한 그릇씩 먹었다. '아이들도 좋아하는 거라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했더니 남편은 '아이들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맛있게 먹고 가자'라고 했다.


나는 나만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흰머리가 여기저기 삐져나오고, 누가 봐도 이제 아줌마가 다 되어서 가끔씩 서글프다고 생각했었는데, 단둘이 밥을 먹다가 문득 남편을 보니 이 남자도 나랑 아이들 먹여 살리느라 많이 늙었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안경을 한쪽 식탁 위에 벗어놓더니 공깃밥 하나를 다 쏟아 우거지 갈비탕에 넣었다. 뚝배기에 담긴 뜨거운 국물을 먹는 동안 이마와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해장국 안에 있던 갈비가 맛있다며 맛있는 녀석들의 김준현처럼 우적우적 후루룩 먹었다.


나는 내 뚝배기에 있던 갈비와 우거지를 건져서 남편 밑접시에 덜어주고, 아까 덜어놓은 밥 반 공기도 먹으라고 주었다. 남편은 나보고 맛있는데 왜 안 먹냐고 내게 다시 밀어주었지만, 나는 소화가 안된다고 하면서 다시 남편 쪽으로 그릇을 밀어주었다. 덜어준 밥과 고기까지 뚝배기에 넣고 남편은 처음 먹는 사람처럼 맛있게 국물 한 방울 안 남기고 그릇을 깨끗이 비워냈다. 난 한쪽에서 코를 풀고 있었다. 서글프고 짠한 걸 감추느라 그런 건 아니고 진짜 콧물이 마구 나왔다.


이 글을 쓴 지 며칠이 지났다. 우리의 주파수는

여전히 지지직 거 린다. 높았다가 낮았다가. 앞으로 어떻게 주파수를 잔잔하게 맞추어야 할까. 김창옥 교수님이 충격적인 조사 결과를 말씀해 주셨는데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여러분, 실제로 부부 사이가 좋은 집이 있다고 합니다. 아주 충격적이죠."



사이가 좋은 집이 있긴 있다.



2022.10.28. 꿈꾸는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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