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의 일기

일기 15. 아줌마의 사진첩

by 책계일주


아줌마의 일기

오랜만에 지난 일기를 쓰려고 핸드폰 사진첩을 뒤적거렸다. 밀린 일기를 쓰는 방법은 간단하다. 사진첩에서 날짜 순서대로 사진을 넣은 다음 기억을 떠올려 쓰는 것이다. 밀린 일기 몰아 쓰는 나의 이야기를 쓰려는데 갑자기 어제 우리 겨울이가 다크서클이 한참이나 내려와서 숙제를 하고 있는 모습이 생각났다. 개수대에 쌓인 밀려있는 그릇들을 폭풍 설거지를 하고, 블로그에 밀린 일기를 쓰고 있는 내 모습과 겹쳐 보였다.








열두 살 겨울이는 식물 관찰 일기가 내일까지인데 아직 한 장도 쓰지 않았다며 빠른 속도로 식물을 그리고 그 아래 덧붙이는 글을 쓰고 색칠까지 했다. 그다음엔 과학 수행 평가가 있어서 83쪽부터 100쪽까지 해야 된다고 했나? 정확한 숫자가 기억이 안 나지만 대략 20쪽 분량의 과학 교과서를 읽으며 돌연 공부에 들어갔다. 그러더니 수학 익힘책 두 쪽을 풀어야 하는 숙제를 하고, 여행 다녀와서 기행문 쓰는 국어 논술 평가는 머릿속에 생각해 놨다며 가방을 쌌다. 열두 살이 된 겨울이는 숙제와 수행평가에 목숨 거는 편이다. 잠들기 전에는 지금 5학년이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말했다.










며칠 전이었다. 6월에는 아이들 기말고사가 있다.
"얘들아, 또 야근하니?" 금쪽이 남편이 말했다. "우리 애들은 참 이상해. 왜 이렇게 공부를 하는 거지? 여름아,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면 꼴찌는 누가 하냐? 책은 왜 읽는 거야? 아빠는 여태까지 교과서 이외에는 읽어 본 책이 없어. 동화도 다 텔레비전에서 보고 알았다니까. 너네 그 만화 아니? '무도사 배추도사', '은비 까비' 이런 거. 자기도 알지? " 금쪽이 남편의 길어지는 '라떼는 말이야' 레퍼토리를 막아야 했다. 아니 시험이 얼마 안 남았는데 그전에라도 시험공부하는 당연함을 당연하다 생각하지 않는 그 당연한 남편의 사고가 이해 가지 않아서 매사 부딪치기 일쑤다. 그렇지만 "알았어~ 자기야. 자기 피곤하겠다. 공부는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하자. 얼른 들어가 자." 하고 마무리한다.



그 사람의 사고를 헤아려보자면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고, 시골에서 자라 한 학년에 딱 한 반만 있는 작은 국민학교에 다녔다. 1학년 때도 1반, 2학년 때도 1반.. 6학년 때도 1반이었고 계속해서 같은 아이들과 같은 반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같은 학년이어도 여자아이들은 한두 살은 기본이고 세 살까지 많은 누나도 있었다고 한다. 그럼 나는 자기는 정말 조선시대에서 온 거 아니냐고 우리가 다섯 살 차이가 맞는지 묻는다. 같이 19년 살다 보니 요즘엔 굳이 그 남자를 설득하지 말고 그냥 이해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첩을 열었다. 요즘은 우리 아이들 찍은 사진도 별로 없고 어찌 된 일인지 대체로 음식 사진과 풍경 사진 그리고 좋은 문장이나 책 사진이 있었다. 세상에.. 나 진짜 아줌마가 되었나 보다. 혹시 우리 엄마 핸드폰 사진첩 아닌가? 온통 꽃과 나무, 하늘 사진에 좋은 글귀라니. 이러다 바람과 숲 냄새, 꽃향기까지 찍을 기세다.





나도 이러다가 우리 엄마처럼 카카오톡 단체톡방에 풍경 사진과 명언을 투척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사진첩에 지난번 읽은 에세이 책 사진이 보였다. 이 사진을 왜 저장했을까. 다시 읽어보았다.



'나만 괜찮으면 돼, 내 인생' 책 중에서





오랜만에 밀린 일기를 쓰려고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풍경 사진과 명언, 좋은 문장들을 우리 엄마처럼 블로그에 투척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단호하게 아줌마는 아니라면서 살아왔다. 오늘 제목은 원래 '밀린 일기'였는데 삼천포로 빠지는 생각들을 끼워 넣어 일기를 쓰고 나니 아줌마가 쓴 일기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제목도 '아줌마의 일기'로 바꾸고 나니 뭔가 글이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가끔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내게는 안 일어날 것 같고, 안 올 것 같은 일들.


아줌마는 어른인데 어른이 되기 싫었나 보다. 오늘은 가끔은 주책맞고, 때로는 우리 엄마 같은 나를 고백하는 아줌마의 일기를 써본다.



2023.6.13 꿈꾸는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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