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는 중

일기 16. 귀뚜라미와 그리운 아빠

by 책계일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름이 가고, 빗소리와 함께 가을이 오는 중이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슬레이트 지붕 아래 부엌 겸 욕실이 있었다. 그곳은 외벽과 연결되어 습하고 추웠는데 나를 곧잘 소스라치게 했던 귀뚜라미가 자주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축축한 외벽에 붙어 더듬이를 세우고 있던 녀석이 가끔 내가 씻으려고 물을 받아둔 대야에 뛰어들면 나의 비명소리에 아빠가 달려오신다.

수도꼭지에 호스를 달아 고무 대야에 물을 받아놓고 썼다. 부엌 한 귀퉁이에는 연탄보일러가 있었는데 그 위에 찬물을 담은 양동이를 올려놓고 끓여서 찬물과 섞어서 세수를 하거나 머리를 감곤 했다.

머리를 감으려면 시멘트 부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세숫대야를 양손으로 잡고 고개를 숙이면 된다. 그러면 아빠는 긴 손잡이가 달린 파란 바가지로 뜨거운 물과 찬물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따끈하게 데운 물을 내 머리에 조금씩 부어 적신 후, 샴푸를 두어 번 짜서 아빠의 두툼한 손으로 내 긴 머리를 돌돌 말아 올린 후 두피까지 거품이 나게 문지르며 싹싹 꼼꼼하게 감겨주셨다.

마지막으로 고개 숙이고 있는 내 머리에 따끈한 물을 부어 깨끗이 헹구어 주신 다음, 미용실 아줌마처럼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물기를 꾹꾹 눌러 짜낸 후 머리카락의 물기를 탈탈 털어낸다. 그러고는 내 긴 머리를 이리저리 손으로 빗으며 드라이기로 말려주신다.

양반다리 자세를 하고는 구부정하게 앉아 밋밋한 러닝셔츠를 입고, 눈으로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드라이기 바람에 귀가 뜨겁다고 엄살을 부리며 투덜 대는 나와 투박한 아빠의 손길이 어렴풋이 떠올라서 한껏 축축해졌던 내 등이 따뜻해져 온다.







오늘은 선선한 가을이 오는 비가 내리고 있다. 어린 시절 나를 곧잘 놀라게 했던 귀뚜라미가 생각나서 그 녀석이 자주 침몰하는 부엌을 그리다가 머리를 감겨주던 아빠의 손이 등장해서 마음이 혼자 축축해졌다.

누구를 그릴지 생각하지 않고 얼굴을 그렸는데 완성하고 나면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과 닮아있는 걸 깨닫는 장면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보고 싶고 그리운 감정을 한 번씩 꺼내지 않으면 자꾸 축축 가라앉는 감정들이 있는데, 무심코 귀뚜라미로 시작한 글이 아빠의 손길로 끝나는 바람에 마음이 한결 후련해졌다.

절대 가지 않을 것 같던 뜨겁던 여름이 가고, 어느덧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는 가을이 오고 있다.


2022.8.23. 처서

2023.8.23. 처서. 꿈꾸는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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