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의 꿈

일기 17. 행운을 먼저 주문하기

by 책계일주


01. 겨울이의 꿈



열 살 겨울이의 꿈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3학년 남자 담임 선생님이 좋았고 선생님처럼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다. 열한 살이 되자 겨울이는 유튜버가 되고 싶다고 했다. 즐겨보는 유튜브는 흔한 남매였다. 요리 영상을 따라 해서 직접 만들어보는 걸 좋아하며 본인은 어떤 콘텐츠를 해야 할까 고민했다.



올해 열두 살이 된 겨울이의 꿈은 아이돌이다. 봄이 누나가 아이돌을 뽑는 '보이즈 플래닛'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성한빈, 장하오, 석매튜, 김태래 이야기를 할 때 같이 봤기 때문이다. 특히, 보이즈 플래닛 참가자 중 박건욱이 나왔을 때 봄이가 겨울이를 닮았다며 호들갑을 떨어서 정말 우리 집에서는 겨울이가 갑자기 아이돌이 된 듯 열심히 춤과 노래를 연습한다. '난 빛나! 꿈꿔왔던 만큼 ~난 빛나! 더 높은 곳에서~ 난 빛나! 빛나~~'



'난 빛나~' 가사가 하루 종일 귀에 맴돌 정도다. 거실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아이돌의 깨알 표정까지 따라 하는 겨울이를 보며 지나가는 여름이에게 말했다.



"여름아~ 봄이 언니가 본인 꿈은 아이돌 누나가 되어서 카페 차리는 거라고 하면서 겨울이한테 세뇌시키더니 겨울이가 진짜 아이돌 된다고 연습해. 네 생각은 어때?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까지 재능 있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얘기해 주는 게 낫지 않을까?"



"엄마, 괜찮아~ 열두 살엔 원래 아이돌이 국룰이야. 그때는 다 그래. 가을이도 열두 살 때 맨날 여자 아이돌 춤 따라 하고 그랬잖아. 중학교 가면 현실을 알게 될 거야."



앞으로 겨울이는 또 어떤 꿈을 꾸게 될까? 조금 무모하고 현실성이 없을지라도 꿈을 꾸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꿈을 꾸는 과정에서 얻는 기쁨이나 작은 성취감이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 마중물이 될 테니까 말이다.









02. 부모님의 꿈



수줍음과 얌전함으로 무장한 열세 살의 나는 일기를 열심히 썼다. 어머 쓰고 보니 겨울이 또래였다. 열세 살 때 다 컸다고 생각한 게 부끄러워진다. 내가 어릴 때 쓴 일기를 아빠는 마치 보물처럼 차곡차곡 모아두었었는데, 아빠가 돌아가시고 이사를 하면서 왜 그랬는지 내 손으로 버렸다. 스무 살에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어른이라고 생각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지'에만 초점을 두고 뒤는 잘 돌아보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러니 어린 시절의 일기나 모아둔 연예인 사진, 그 시절 좋아하던 가수의 노래 테이프, 교복이나 안 입는 옷, 이제 안 볼 책들을 다 갖다 버렸다.




엄마가 되고 아이를 키우면서 우리 아빠가 왜 아이들의 성장 과정이 담긴 기록이나 사진을 소중하게 여겼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어른도 아이의 시절을 지나온 사람이기 때문이란 걸. 아이가 처음 발걸음을 뗐을 때,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빠가 깎아주신 연필로 그 작은 마음을 고사리손으로 재잘재잘 공책에 써 내려갔을 때. 어른이 된 아빠는 아이의 모든 시작과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다시 아이의 시절을 한 번 더 살았을 것이다.




아이는 '또 다른 나'이면서 나보다 잘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아이는 부모님의 꿈이었다. 부모님은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지만 우리 아이는 나보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을 것이다. 지금의 나처럼.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되어보니 정말 그랬다.



엄마에게 나는 늘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게 무엇이든. 엄마는 내게 대부분의 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신지' <평일도 인생이니까> 중에서



내게 우리 엄마도 대부분의 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나보다 실은 늘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건 엄마의 가장 힘들었을 나이 마흔셋을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아무 준비 없이 마흔셋의 나이로 자식 셋을 혼자 키워야 한다는 건 눈앞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폭풍우 치는 파도에 꼼짝없이 혼자 서있는 거라는 걸. (...) 엄마 나이를 지나버렸는데도 난 아직도 철부지 딸이다. 고마움도 미안함도 직접 말하지 못했다.










03. 아줌마의 꿈



언젠가 봄이가 그랬다.



"엄마 꿈은 뭐야? 설마 우리가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는 거? 그런 건 아니겠지? 난 엄마가 그냥 엄마의 꿈을 가지고 살면 좋겠어."



내가 엄마가 된 후 꿈이 있었나? 아줌마의 꿈...











나의 꿈은 봄이 말대로 그저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자기 몫을 다하는 사람으로 독립시키는 게 엄마로서의 목표이고 바람이었다.




겨울이의 해마다 바뀌는 꿈처럼 나의 마흔두 살 때의 바람은 소화불량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마흔세 살 때의 바람은 바깥으로 나간 심장을 데려와 제자리에 놓는 것이었고, 블로그에 처음 일기를 쓴 마흔네 살의 바람은 알레르기로 오는 불안을 잠재우는 것이었다.




마흔다섯 살일 때야 비로소 나는 하고픈 일이 생겼다. 블로그에 모든 요일을 기록하는 일이다. 방문자도 많지 않고 읽어주는 사람이 별로 없어도 글을 쓰는 내가 최초의 독자이므로 그것에 가장 큰 의의를 두었다.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우울하고 불안하다 무얼 해보고 싶다 등 혼자 끙끙대며 고민하는 것보다 여기저기 알아보고 배워가면 된다는 걸 블로그 세상에서 만나는 이웃님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마흔여섯 살. 얼마 전에는 이력서를 내듯이 브런치 스토리 작가도 신청하고, 서평 쓰기 신청도 해보았다. 그러자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브런치 스토리 작가 합격 알림이 왔고, 서평단에서 한 권의 책이 왔다. 오늘은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두 번의 서평단 당첨 문자가 왔다. 며칠 전에 서평단 신청을 한 번 더 했기 때문이다.







- '나만 괜찮으면 돼, 내 인생 책' 중에서 -


내가 가성비를 따져가며 물건을 고른 후 장바구니에 넣고 결제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면 택배로 오지 않을 일이었다. 정작 고르고 담고 버튼을 누르지도 않고 하염없이 내게만 안 오는 행운을 탓하고 있었다.


행운은 그냥 오는 게 아니었다. 내가 행운을 먼저 주문해야 오는 거였다.




"봄이야. 엄마의 꿈이 생겼어. 어떤 네모난 명함을 가진 꿈이 아니라 겨울이가 숙제와 수행평가를 도장 깨기 하듯이 해내고 행복하다고 하는 것처럼, 엄마가 그냥 할까 말까 망설였던 일을 하나씩 시도해 보는 게 꿈이야. 무슨 일이든 단번에 되진 않더라. 어떤 일이든 해나가는 과정에서 기쁨도 얻고, 낙담하는 마음도 생기고, 아마 다 그만두고 싶기도 할 거야. 하지만, 시도해 보는 것과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것은 다르니까 시간 낭비가 아니라 소중한 과정이 될 거야. 방구석에서 일단 예매 티켓팅을 시도하다 보면 바깥으로 나가는 열차를 탈 수 있겠지?"







"여름아~ 엄마가 요즘 책 읽고 서평 쓰기 연습해. 네 생각은 어때?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까지 재능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만하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엄마, 괜찮아~ 마흔여섯 살엔 원래 여기저기 끼어들어 이것저것 해보는 게 국룰이야. 그때는 다 그래. 닥터 차정숙 아줌마도 마흔여섯 살에 레지던트 시험 보고 공부했잖아. 엄마도 계속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얻어 가는 게 분명히 있을 거야."



(※마지막 문단, 여름이와의 대화만 상상으로 덧붙입니다. 아마 여름이는 그렇게 말해줄 것 같아요. )



2023.6.16 꿈꾸는 일기


이전 16화가을이 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