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기의 달인
일기 18. 점심을 좀 차리길 바랍니다
한참 뜸을 들이던 여름의 발걸음이 이제야 떠나는 것 같다. 여름이 길게 느껴졌다. 날이 워낙 더웠던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내게 여름이 길게 느껴졌던 진짜 이유는 친구를 만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친구는 이번 여름뿐 아니라 올해가 정신없이 빨리 지나가서 아쉽다고 했다. 새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는 직장에 적응하는 중에 계획에 없었던 이사를 갑자기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사를 간 곳에서도 적응하다 보니 어느새 벌써 여름이 지나갔다고 한다.
결국 변화 없는 나의 일상이 여름의 무료함을 가져다준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어제 같은 기대되지 않는 일상이 말이다.
무리하고 싶지 않은 것과 노력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고 위안을 삼아 보지만, 반쯤은 노력을 게을리한 게 맞고, 반쯤은 몰라서 늦은 거 맞고. 그렇다.
8월에는 글쓰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글을 쓴다는 건 내 안에 있는 생각이나 마음을 꺼내는 일인데 귀찮아서 자꾸 뒤로 미루었다. 미루기의 달인. 미달이는 우리 집 가을이 별명인데 나도 실은 미달이었다.
블로그에 글쓰기 이전에는 몰랐던 사실이 있다. 그건 바로 내가 생각하는 나와 행동하는 나가 다르다는 것이다. 일기를 쓰면서 나를 알아차린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차분하고 신중하고 온화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일기 속 나는 내 생각과는 달랐다. 몸은 하나인데 마음이 바쁘니 조급함이 주특기이고, 그 상황을 빨리 해결하려고 하니 실수가 잦아지고 당황 모멘트가 나오고, 도파민이 즉각적으로 나오는 콘텐츠와 금방 사랑에 빠지고, 아이들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좋은 부모가 되어야지 다짐하면서도 순간순간 욱하고, 이제부터 달라져야겠다고 다짐하자마자 기운이 쭉 빠지고, 그런 나를 반성하다 보면 다시 아무것도 건드리고 싶지 않은 딜레마에 빠진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멘붕인가.
8월에는 무척이나 더운 날씨도,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일들도, 나를 알아차리는 일들도 내게서 조금 멀찍이 밀어놓았다. 9월에는 조금 더 부지런해져야겠다. 엄마니까 점심을 좀 차려야겠다.
카카오톡 이모티콘 2023.9.2 꿈꾸는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