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블로그에 글을 쓸 때는 뇌를 거치지 않고 흘러나오는 대로 썼다. 창피한지도 몰랐다. 어느 날부터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내 글을 읽기 시작했다. 하트 2 개, 댓글 1개, 서로 이웃 신청 3명. 세상에 이런 일이!
나는 학교 다닐 때 자발적으로 손들고 발표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기록의 보유자다. 근데 자주 운이 나빴다. 그날이 10월 14일이라면 14번을 부르는데 꼭 나다. 그럼 어쩔 수 없이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떨리는 목소리로 발표를 하곤 했다. 교단 위로 올라가 칠판에 수학 문제를 푸는 날에는 아이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리는 것만 같아 분필 든 손이 덜덜 떨리고 뒤통수까지 빨개진 기분이었다.
남들의 시선이 내게 오는 것이 여전히 두려운데 이렇게 블로그에 일기를 쓰다니. 무슨 용기였을까. 속마음을 쓴 글을 누군가 읽기 시작하자 가슴이 더 콩닥콩닥 했다. 마음이 이상했다.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과 그냥 지나쳤으면 하는 마음이 교차했다. 빨개진 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글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니. 글쓰기는 점차 현실에서도 내 얼굴빛을 바꾸어주고 있었다.
예전에는 책을 읽기만 했는데 블로그를 하면서 읽은 책을 기록하다 보니 좋은 글과 생각이 내게 차곡차곡 쌓인다. 아직도 나의 글쓰기는 일기에서 에세이로, 독후감에서 서평으로 넘어가지 못했지만 이렇게 쓰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문턱을 넘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이유로 내가 읽고 보고 듣고 느끼고 접하는 모든 것들을 블로그에 기록하려 애쓰고 있다.
글쓰기로 먹고사는 사람. 막연하게 작가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서평단 신청 마감 마지막 날 우연히 본 제목에 이끌려 신청을 하고는 신청자가 너무 많았던 터라 잊고 지냈는데 책이 집으로 도착했다. 생각지도 못한 작가님의 답장을 받은 듯이 기뻤다.
정아은 작가님은 은행원, 영상번역가, 학원 강사, 헤드헌터를 거쳐 2013년 <모던 하트>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는데 주변에서 멀쩡한 직업세계로 다시 돌아가라고 했다고 한다. 이 판에서 탈출하라는 이유는 이 일로는 돈을 못 번다는 것이었다고. 작가님은 나중에야 베스트셀러를 제외하고는 그 이야기들이 정확하고 유용한 충고였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글쓰기를 지속하며 꾸준히 책을 쓰고 계시다. 작가가 된 후에도 투고 거절과 원고 반려 메일을 받기도 했다는데. 다시 쓰는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 책은 1부와 2부는 쓰기의 기술에 해당하는 작법서이고, 3부와 4부는 쓰는 이의 삶에 관한 에세이를 담았다. 1부는 글쓰기의 시작과 심리를 파헤치는 것을, 2부는 글쓰기의 시작부터 완성까지 서평, 칼럼, 에세이, 논픽션, 소설로 나누어 글쓰기의 특징과 쓰는 방법 등이 나온다. 3부는 작가로서 11년 동안 어떤 마음으로 써왔는지를 시간순으로 기술한 에세이를, 4부는 작가로 살면서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소고를 담았다. 개인적으로는 구체적인 쓰기의 방법을 알려주시는 1부와 2부가 실용적인 기초 자습서처럼 도움이 되었고, 특히 소설 쓰기 방법은 처음 접하는 분야라 더 흥미롭게 읽었다. 글쓰기를 시작하는 분이나 작가가 되고 싶은 분이라면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글쓰기를 잘하는 유일하고 효과적이고 치명적인 방법은 단 하나, 많이 쓰는 것이라고 한다. 많이 쓰기 위해서는 잘 쓰겠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고. 이왕이면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는데 그 마음부터 고쳐야겠다. 결국, 많이 쓰는 것에 답이 있었다. 작가님 말씀처럼 초고를 쓰고 다시 고쳐 쓰고 이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는 동안 본인도 모르게 술술 써지는 것일 것이다. 운동선수들이 같은 동작을 반복해서 훈련하다가 강도와 속도를 달리해 가며 다시 반복해서 훈련하다 보면 몸에 배어 본인도 모르게 실력이 성장해 있는 것처럼. 잘 쓰고 싶다면 읽고 쓰고 고쳐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
작가님이 혹시 T가 아닐까 생각했다. 글쓰기의 시작부터 작가로서의 핵심 정체성과 사는 둘레까지. 글 쓰는 사람이라면 궁금해할 쓰기의 기술부터 누구도 말해주지 않은 글쓰기 세계의 리얼리티를 논리 정연하게 거침없이 깊이 있게 서술한다. 나는 자주 망설이거나 자신이 없으니 희미한 의견을 내세우는 편인데, 작가로서의 생존해 온 이야기를 거절 서사나 직업적인 고충의 바닥까지 드러내는 솔직함이 오히려 당당하고 멋져 보였다. 치열한 글쓰기의 세계에서 엉덩방아를 찧으며 울었던 본인의 과정을 블랙코미디라 칭하면서 가감 없이 보여준다. 내게는 그런 거절의 세계조차 열정적으로 느껴졌다.
작가님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모두 거절의 시대에 살고 있다. 거절의 폭우를 맞으며 하루하루를 넘기는 우리에게, 우리를 지탱하게 만드는 적절한 연료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 '거절'이 좌절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도약의 순간이 될지도 모르겠다.
[책 내용 중에서]
역사상 존재했던 그 어느 시대보다 더 정교하고 치밀해진 자본주의 체제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쩌면 모두 '거절'을 핵심 정체성으로 삼으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포장을 둘렀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현대 사회에서 돈을 벌며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거절'의 폭우를 맞으며 하루하루를 넘긴다. 314p. 에필로그
이 서사가 각자 다른 위치에서 각박한 시대를 살아내고 있을 이들에게 한 조각 웃음, 한 조각 위로, 한 조각 정보, 혹은 한 조각 심정적 지지로 맺힌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315p.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