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과연 넌 뭐냐!’
어린 시절, 소설을 읽으며 침을 묻혀 가며 책장을 넘기던 ‘나’는 인터넷을 뒤져 공짜 독립영화 무료초대석을 찾아 온라인 세상까지 휘 젖고 다니는 ‘낭인’이 되었다. 영화 속 작은 에피소드에서 서사가 가져다주는 인간 본질에 대한 짧은 물음에 작은 위안을 받을 수만 있다면 ‘거지’가 돼도 좋았다.
이 글을 쓰면서도 수 십 년째 간직해 둔 질문 하나가 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야성의 정제되지 못한 날 것의 궁금증을 안고 살아내는 게 버거웠던 지난날이었다.
그런 암흑의 우주공간 같았던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 제198회 독립영화 쇼케이스 <피아노 프리즘>을 홍대 인디스페이스에서 만났다. 세계적 전염병을 앓고 격리된 경험을 가진 ‘인간’이 다시 살아가는데 그전과는 조금은 달라져야만 하지 않을까.
중력이 작용하는 '지구'라는 곳에서 언제나 땅을 밟고 사는 '나'가 있다. 서울의 홍대 앞 작업실에서 다시 은평구 작업실에 갇혀 그림을 그렸던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오직 끊임없이 피아노를 친다.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찾아가는 학원 길 올라탄 버스 위에서도, 그리고 흔들리는 거리에서도 '나'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끊임없이 설명한다. 스크린을 보는 장애인을 위한 '글과 말'을 넘어 선 배려에는 정체성을 찾아가는 '나'의 몸부림이 피아노 건반의 다양한 패턴을 익혀야 완성되는 '곡'을 찾아가는 반복되는, 실패의 흔적도 고스란히 담긴다.
박살 난 조각상의 얼굴 부스러기마저 다시 창작의 시공간으로 연출하는 중력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나'가 있다.
마치 동경하는 저 우주의 '별'에 닿고픈 '나'의 간절함이 중력에 발이 묶어 날아오르지 못하는 무명화가의 하얀 캠퍼스 빈 공간에 갇혀있는 욕망에서 탈출하고픈 절규 같다.
평면 위 정적인 공간에서 중력을 넘어 존재의 무게에 갇힌 '나'는 말 못 하는 벙어리가 되어 버린다. 누군가가 알아봐 주지 않는 '나'는 또 다른 장애인이다.
길거리에서 울고 있는 어른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세월호와 강정마을, 5.18 광주, 그리고 물대포에 맞고 쓰러져 끝내 하늘로 올라간 한 농부의 저항까지 존재의 허무함을 알기에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나'는 이제 비로소 '도민'이 되고 '시민'이 되어간다. '피아노'는 소리를 내는 악기에서 '배'가 된다. 진화하는 인간의 한 부류로서 땅을 딛고 일어서기를 한다.
화가이자 이 영화의 감독인 오재형 씨는 피아노를 타고 향해를 시작한다.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1차원 평면에서 고립되어 멈춰 기다렸던 포유류의 화가 '나'가 배를 타고 건너가기를 시도한다. 화가의 은퇴식도 과감하게 선언한다. 수평선 같은 1차 평면의 끊임없는 흑과 백의 건반에서 손가락이 찾은 패턴으로 연주되는 보이지 않는 음계의 높고 낮음의 시공간 소리의 흐름은 3차원을 넘어 새로운 공간을 채운다. 혁명과도 같은 1차 그림판을 넘어선 진화다.
이는 다수를 따라야만 했던 지난 시절의 엉터리 민주주의의 관념에 봉인되어 정부보조금에 길들여진 소수자들과 장애인들, 예술인들의 아픔까지 위로하는 하나의 '곡'이 되고 틈틈이 만들어 놓았던 애니메이션과 댄스필름, 그리고 실험영화와 기획 공간연출 등 다양한 행위들의 조각들을 맞춰가며 마침내 그토록 원했던 피아니스트 '나'로, 동경하는 별에 닿는다.
피아노와 중력은 사라졌다.
그동안 건너오는 과정에서 외면받았던 '나와 우리'가 따뜻한 시선이 되어 친절한 목소리와 자막으로 그 설명까지 배려가 깃든 베리어프리 영화의 기본적인 표현마저 일반화시킨, 깊어지고 넓어진 수많은 별들이 존재하는 다공간의 우주가 비로소 탄생한다.
어느덧 가슴속 숨겨놓은 질문과 마주한다. 1942년에 태어난 스티븐 호킹 박사는 세계적인 천체물리학자로 활동했는데 그는 죽기 전 인터뷰에서 우주에서 외계 생명체를 만나면 그들과의 접촉은 피하는 게 좋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우주에서 외계생명체를 만나야 되냐? 아니면 그냥 모른 체해야 하나?’
엉뚱하겠지만 지난 2021년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경쟁부문 초청작이었던 <피아노 프리즘>을 통해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주인공 ‘나’가 화가라는 예술인에서 피아니스트로 다시 종합 예술인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부족한 영화적 요소를 음성해설과 자막으로 채워지면서 ‘배리어프리’라는 영화 형태를 갖추는 카니발적 창조가 영화전반이 더 나은 다큐로 울림을 줬다고 주장하고 싶다.
의도되었던 아니든, 주위에서 예측되지 않는 여러 상황에서 영화 대본대로 이뤄지는 소품의 형태가 촬영장의 상태에서 여의치 않을 때는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 촬영되는 몫과 책임은 감독의 재량이다. 많은 독립영화 촬영장이 어려운 여건에서 이렇게 탄생되는데 <피아노 프리즘>은 감독이 스태프의 모든 부분인 연출 제작 촬영 편집 미술 출연까지 소화해 내면서 가요계의 ‘유재하’처럼 홀로 해냈다.
https://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979016
혼자 해서 대단한 게 아니라 비전문가가 자신의 기존 존재방식이었던 ‘화가’를 벗어던지고 피아노를 배우면서 다큐까지 표현되는 기록을 넘어 결국 아티스트로 탄생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아름다움이 발현되었다는 것이다.
2024년 지구는 전쟁과 이상기후와 세계국가의 선거로 인한 자국의 권력싸움으로 오염되어 가고 있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의 삶은 드라마틱한 서사가 되고 있다. 25회 서울여성국제영화제의 ‘우리는 훨씬 끈질기다’ 슬로건이 여성과 예술인을 넘어 모든 인간 삶의 ‘진정성’을 토해내고 독립영화현장에서는 ‘영혼’을 갈아 넣은 작품들이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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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누구를 위한 영혼 팔이 인가?’
초등학교 과학시간에 프리즘을 통해 태양에서 흘러나온 하나의 빛이 아름다운 여러 갈래의 색으로 나뉘는 것을 보았다. 민주주의의 최고의 가치는 다양성이며 소수에 대한 배려이고 성숙된 의식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돈을 좇는 사람과 별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사람’으로 나눈다면 자본에 길들여진 대중상업영화와 구분된 독립영화의 존재에는 ‘별’의 힘이 있다. 이것은 <피아노 프리즘>에서 인간을 위로하는 ‘예술’로 향한 ‘나’의 삶과 연결된다.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4.16 세월호 사건으로 304명의 별이 되신 희생자분들과 전 세계적인 코로나 팬데믹에서 3년간, 우리나라 코로나 사망자 수는 3만 6000여 명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비로소 되찾은 자유로운 이태원 거리에서 10월 29일 토요일, 핼러윈 축제로 수많은 인파가 몰린 와중에 196명이 다치고 159명이 압사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슬픔과 비애가 끓어올라 미칠 것 같아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일들을 겪는다. 원시 사회에서부터 인간은 불확실하고 위험한 거친 야생의 자연에서 인간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지능의 발달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공동체생활을 통한 안전한 생활권을 만들고 그것이 바로 문화가 된다. 자연을 극복한 ‘문화’가 자연의 반대말이 되는 것은 인간이 걸어가는 길, 살아가는 길, 그리고 맞서서 이룩하는 것이 바로 인류의 힘, ‘문화’가 되는 것이다.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앞으로, 미래로 나가기 위한 고귀한 인간의 존엄과 생존을 위한 기본이다.
위대한 대한민국 국민들은 역사 속에서 지난 1960년 4.19 혁명,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1987년 6.10 민주항쟁 등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존엄과 가치를, 민주주의를 수호하면서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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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분들이 ‘별’을 쫓는 삶이며 독립영화도 사각의 스크린을 벗어나 기록을 넘어 인간을 위로하는 예술적 방향성과 결을 같이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런 이유일리라.
지난 대선 이후 0.73%의 차이로 나뉜 반쪽의 국민들이 다시 올 총선으로 조각나고 있으며 정치에서 비롯된 이 모든 것이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사회전반에서 부서지는 ‘쿠키’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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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 이후 이스라엘과 하마스 등 중동 사태가 다시 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대한민국의 국제상황과 함께 국민들의 삶은 전세사기와 주식 반 토막, 각종 학폭 사태와 범죄 등으로 인간 존엄과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 국가가 고민해야 할 사회 안전망이 허물어지면서 송파구 모녀 자살 사건 이후 또다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가족들의 가슴 아픈 사건이 계속 발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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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소득 3만 달러’의 경제성장을 했다고 선진국이라고 자랑 질 하는 정부관계자들은 이제 입을 닫았지만. 이들의 자화자찬하던 그때에도 산업화-민주화 등으로 압축경제성장을 거치면서 수많은 희생과 아픔을 견디며 참고 인내한 국민들의 삶에 대한 이해 없이 돈으로만 따지는 기득권 정치사회였다.
그러니 수십 년 동안 전 세계 OECD국가 중 출산율과 자살률이 최고치를 기록해도 해결 못하고 인구절벽의 대한민국을 맞이한 것이다.
그러고도 젊은 청년들이 거리에서 목숨을 잃어가도 책임지지 않고 제대로 된 안전시스템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대책 마련 등에 신뢰와 믿음을 국민들에게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돈을 좇는 사람들은 ‘권력’을 탐하고, 다시 세력을 만들어 정쟁을 만드는 부패기득권정치를 하며 <슬픔까지도 정쟁화>하는 정글이 되어버렸다. 별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사람은 ‘존엄’을 말하고 인간으로서의 삶, 국민 삶을 이야기하며 문화를 만든다.
진화된 인간은 스스로 일어나 정글과 같은 기득권 세력들에 의해 지배되고 무너진 대한민국 국민의 삶에 인류애적인 그들의 영혼을 새겨 넣으며 길을 만든다.
지난해 9월, 고 서이초 교사 49제 추모집회에 동료의 죽음에 대해 함께 아파하고 교사의 역할과 사회의 진정한 어른이 되고자 목소리를 냈던 훌륭한 대한민국의 선생님들을 기억한다.
지금의 시대정신은 ‘진정성의 시대’이며 자신의 삶의 궤적을 내보이며 진실을 토해내는 별의 시대이다. 피해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존엄을 외치고 학폭 피해와 인권유린에 대해 자기 스스로 성토하는 그런 시대, 그래야 바뀌는 진정성의 시대, 별의 시대이다.
이는 김경만 감독의 <돌들이 말할 때까지> 4.3의 피해 할머니 다섯 분의 다큐와 연결된다.
살아있는 생물이 돌이 되는 순간이 있다. 너무 말이 안 되어 한순간 얼어붙어 굳어 버리는 것. 생물학적으로 경직된 순간을 넘어 정신세계마저 송두리째 붕괴시키고 사랑이 인간 본질의 한 부분이라고 믿고 있는 '나'를 벼랑 끝으로 밀어붙인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 돌과 할머니는 지난 70여 년을 그렇게 버텨내고 있다. 격동의 현대역사의 진실이 언제쯤이면 상처를 통한 타인의 공감을 넘어 포개어져 진정한 대화로 진영과 이념을 넘어, 우리 민족의 상생과 번영, 인간의 가장 기본이 되는 '존엄'의 가치까지 함께 말할 수 있을까.
성선설을 믿고픈 사람에게 자연은 인간이 꿈꾸는, 닮고 싶은 세계다. 순수성과 유연함에서 오는 부드러움을, 때론 물과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자연은 인간이 될 수 있어도 인간은 그동안 자연이 되지 못했다. 날 것의 자연계에서 뛰쳐나와 인간계를 만들겠다는 욕망에서 비롯된 추잡한 이념은 약탈의 야만성을 넘어 학살이라는 비인간성으로 표출됐다.
블랙 스크린 공간에 띄워진 제주 4․3 희생자 북촌리 위령비의 문구 '그 크나큰 슬픔의 권능으로 인간의 어리석음을 바르게 다스려 주소서'는 무지와 무능의 육지 것에 불과한 영원한 타자 '나'를 다시 침묵시킨다. 김경만 감독의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양농옥·박순석·박춘옥·김묘생·송순희 다섯 할머니 이야기로 4.3의 크나큰 슬픔과 인간의 어리석음을 전한다. 동굴 안에서 밖을 향하는 한 컷의 이미지만으로 어둡고 은밀한 곳에 숨겨진 그들의 깊은 상처는 물론 그 상처가 개인을 넘어 인류를 향한 밝은 빛으로 발화되기를 바라는 희망까지 담았다.
이어지는 장면은 파도가 치는 바닷가 해변, 여기저기 놓인 돌덩이. 돌은 견뎌내고 있다. 거대한 바다를 내달리다 해안가 육지에 이르러 어느새 새하얀 물살의 파편들로 사라져 가는 자연의 바다를 온몸으로 맞고 있다. 삭히고 깎인 표면이 인간의 DNA가 되어 역사로 남기를 바라듯, 절대 잊을 수 없는 진실의 목격자로서 돌들은 파도와 거센 바람 앞에 요동치며 울부짖는다.
1948년 당시 스무 살 내외였던 다섯 할머니는 4.3 참상의 진실을 이끌어 내준 수형인명부와 연결된다. 왜 그들이 군사재판을 받고 좁은 형무소에 갇혀야 했는지, 그것이 과연 합당한 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슬픈 역사의 진실이 드러나게 됐다.
김 감독은 7년 7개월간 벌어진 4.3에 대한 전체적인 시각이 아닌 5인의 여성이 감당해 낸 개인적인 삶에 집중한다. 이때 증언하는 할머니뿐 아니라 제주 4.3 도민연대의 수형인 면접조사원과 그들의 질문도 비중 있게 다룬다. 증언의 내용에 더해 증언을 담는 역사 기록 과정의 어려움과 가치를 입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다.
감당하기 힘든 역사의 무게 앞에서도 독립적이었던 다섯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은 4.3의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간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 박순석 할머니는 남로당에 가입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교육을 받았다고 증언했지만 그것이 대대적인 토벌의 명분이 되고 빌미로 역사의 변역자라는 가혹한 공격에도, 산에서 제주 공동체의 삶을 지키기 위한 순수하고 당연한 선택이었고 그것마저도 역사에 남겨주기를 바라며 당당하게 역사의 진실을 알렸다.
남로당에 가입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교육을 받았다고 증언하는 박순석 할머니는 반역자적 죄인이라는 남로당을 향한 부정적 시각을 정면으로 받아낸다. 그녀는 3년 형을 구형한 군사재판 과정의 얼토당토않음을 토로하며 그로 인해 고통받은 지난 삶의 억울함을 얘기한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역사에 남기를 바란다는 마지막 발언을 통해 군 병력에 의한 대대적인 토벌의 명분을 줬던 산에서의 행동이 제주 공동체의 삶을 지키기 위한 순수하고 당연한 선택이었음을 선명히 아로새긴다.
아버지를 잃어버린 양농옥 할머니, '나를 왜 죽이려 하느냐'고 당당히 외치며 군인한테 항의했던 김묘생 할머니, 중산간에 숨어 지냈던 박춘옥 할머니, 그리고 자식을 형무소에서 잃고 뒤늦게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돌아왔지만 이미 주변인의 권유로 재가해 살았던 송순희 할머니의 이야기는 가혹하다 못해 뼛속까지 아리게 한다.
특히 송 할머니의 딸이 인터뷰에 담기면서 4.3이 그들 가족과 제주지역에 국한된 아픔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영화는 2019년 1월, 제주지방법원이 공소기각 판결을 통해 18명의 4.3 생존수형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던 장면도 고스란히 담았다.
당시의 군사재판이 적절한 변론의 기회와 방어권을 보장하지 않은 총체적 불법이었음을 70년이 넘어 인정받은 것이다. 영화는 이를 담담하게 처리했는데 어쩌면 남아있는 역사의 무게가 더 크기 때문이리라.
영화는 해방이 또 다른 고통인 된 무정부 시대, 즉, 스스로 만들어 내지 못한 해방의 뒤틀림이 미국과 소련에 의한 분단으로 이어진 역사의 소용돌이를, 그리고 그 속에서의 '자주독립'과 '통일'의 혼백을 이은 제주도민의 선택을 이야기하며 숙제를 던진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 김경만 감독은 자연영상을 통해 인간이 된 자연을 마주한 듯 경이롭고 제주 4.3의 참상으로 벼랑 끝, 붕괴되기 전의 인간을 포근히 감싸주며 위로한다.
특히 영화는 증언하는 할머니와 분노하는 관객들의 감정까지도 눈보라와 눈 쌓인 나뭇가지, 심지어 폭죽의 불꽃 등에 담아내며 영상미로 진정성 있게 표현했다. 이는 인간이 된 자연을 마주한 듯 경이롭고 벼랑 끝에서 붕괴되기 전 '나'의 혼란한 침묵을 포근히 감싼다.
어느새 정적 속 눈 쌓인 산등성이 장면에 이은 눈을 따뜻하게 품고 있는 돌이 스크린을 채우면서 비로소 5인의 할머니가 돌이 되어 말한다.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된다. 파도와 바람의 기억까지 품은 다섯 할머니의 영성이 '나'를 위로한다. 인간은 존엄 그 자체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를 관통해 우주 속 암흑을 지나 <피아노 프리즘> 스크린을 마주했을 때 마지막 소규모 피아노공연장면에서 ‘나’가 연주하는 피아노곡에 위로받는 관객들의 표정에서 스크린 밖 독립영화 관람객인 또 다른 ‘나’는 따뜻해진다.
단절의 코로나 시절을 보내면서 더욱 값진 이웃에 대한 그리움이 ‘상처를 치유’ 받는 느낌이었다. 음악 공연이 그랬고 영화가 그랬다. 지난날 ‘복지국가’라는 언론의 앵무새처럼 따라 표면적인 인식만 해왔던 말이 독일의 한 철학자가 ‘민주주의를 지키는 사회국가’라고 풀어서 말하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그렇다.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선전구호처럼 떠들어 대던 지난 ‘나’의 삶이 프리즘을 통과한 빛처럼 세밀하게 살펴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돌봄이 필요하다. 출산율이 0.78밖에 되지 않고 어르신 고독사를 넘어 청년과 특히 젊은 여성 및 중장년층의 자살률도 계속 높아지고 있다.
보육청소년의 자립문제와 은둔형 외톨이들의 사회적 문제도 연일 뉴스에 나오고 있고. 각종 묻지 마 폭행 등 사회문제들은 이제 그들만의 문제도, 우리 개인의 문제도 아닌 사회와 국가가 너무 방치하고 다수에 맞춰 따르게 했던 과거의 잘못에서 비롯됐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879806
영화와 민주주주의 공통점을 생각해 보면 다양성, 포용성, 약자와 소수에 대한 배려, 존중하는 마음, 감동, 진정성, 통찰력, 인간에 대한 믿음, 희망, 미래라고 본다. 그 힘을 가지고 우리 사회가 포용하는 힘을 갖지 못하고 성장만 강요하는 성공스토리와 다수들의 이해관계에 매몰된 지난날을 반성해야 한다.
이제 코로나 이후 각성된 힘을 소외된 사람들의 아픔을 알고 그동안의 상처가 타인과 공감하는 소중한 지혜로 사용될 수 있도록 스스로가 알을 깨고 나오는 기회로 성장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다. 독립영화의 존재 역시.
이제, 스티븐 호킹 박사가 말한 우주에서 외계생명체를 피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거부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신과의 싸움에서도 ‘저기가 절벽이니 가지 마라’고 말해도 반드시 가고 마는 ‘호기심’과 ‘모험’으로 결말을 아는 신들을 질리게 만들어 버릴 존재라는 것을.
그러니 ‘열린 지평’을 향한 인류의 진화에서 외계생명체와 만나 또 다른 역사를 써 나가야 할 가치가 있다. 자원부족과 고갈, 그것으로부터 지구침략이라는 가상의 공포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만남을 가져야 할 인간의 존재방식이 있지 않은가.
결국 <피아노 프리즘>은 ‘나’와 ‘당신’ 우리 모두에게 말하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인간 삶이 예술이고, 인간진화는 계속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