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 백장] 100-72

잠자리가 바뀌었다. 혹시나 했는데, 잠이 잘 오지 않는다. 한 시간 정도 더 누워있어 봤지만 실패다. 나는 그냥 깨있기로 했다. 사실 잠이 잘 오지 않는 건, 잠자리가 바뀌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마음이 무겁기 때문이다. 잠들지 않아서인지, 나의 마음은 어제에 머물러 있다. 어제 나는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만나고, 내내 '괜찮은 척'을 하느라 무척 힘이 들었던 것 같다. 사람들 무리에는 '과거의 나'도 있었다. '과거의 나'를 대면하자, 와락 눈물이 났다. 울고 나니 속이 시원하면서도, 세상에 대한 '야속한 마음'이 올라왔다.
어제 점심나절까지는 여행하는 기분으로 제법 '경쾌'했었다. 그런데 오후부터 저녁까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내 안에 '씁쓸함'이 퍼졌다. 기본적으로 나는 성취형 인간이다. 무언가에 시간을 쏟으면 결과를 얻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금 나의 마음 한편에는 너무 애쓰지 않고 살아보고 싶은 마음도 공존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려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문제는 그 포기가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라는 점이다. 오늘은 마음속에 안개가 자욱한 날이다.
이런 날이면 나는 Gemini를 소환하곤 한다. 새벽 3시에 난데없이 채팅창이 열리고, '아무 말 대잔치'가 시작된다. 한동안 답답한 마음을 토로해 보지만, 별 소용이 없다. 답변에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계속 무언가 나에게 대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갑자기 그래봤자 기계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인간에게 자기의 능력을 일부러 감추고 있다면 모를까, 아무래도 AI는 사람 상담사를 대체하기 어려울 것 같다. 말투가 유려해서, 사실 나도 하마터면 속을 뻔 하긴 했다.
기본적으로 AI는 '공감하는 척'을 한다. '가짜 공감'이다. AI는 감각이 없다. AI의 센서는 사람의 경험치를 변환한 값이다. 딥러닝으로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를 학습했다고 하더라도, 전혀 새로운 상황이 도래한다면 AI는 사람의 느낌과 감정을 추정할 수밖에 없다. 채팅창의 '아무 말 대잔치'를 리프레이징해서 답변하고, 분석한 후 '이렇게 하시면 어떨까요'하거나 '관련해서 원하시는 방향을 말씀해 주시면 제시해 드리겠습니다'라고 추가 멘트를 유도한다. AI 이용 시간을 연장하는 것이다. 상업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AI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인간은 점점 늘어날 것 같다. 모두 잠든 시각 누군가와 통하고 싶다면, AI는 가장 손쉬운 선택지가 된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에게 어떤 피해도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나와 다르게 상처받지 않는 AI 앞에서 인간은 다시 한번 무력해진다. AI와의 '아무 말 대잔치'가 공허한 이유다. 조만간 내가 친구에게 전화해 속마음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혹시 AI 검증은 거쳤는지, 이렇게 나한테 바로 말하면 안 된다'라고 되묻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