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 백장] 100-82
"빨간색하고, 파란색 중에 뭐 했어?"
"나 파란색."
"어땠어?"
"생각보다 잘 맞는 느낌이던데, 정말 나랑 비슷했어. 잘 맞추더라고."
"나는 제대로 답을 못한 게 너무 많아서, 백 프로 떨어질 것 같다. 휴."
"덜컹덜컹."
가끔 지하철에서 옆 사람의 대화가 귀에 쏙쏙 들어올 때가 있다. 본의 아니게 나는 청년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게 됐다. '빨간 휴지, 파란 휴지 괴담도 아니고. 뭘 골라?', '심리 테스트를 한 건가?' 속으로 혼자 물어보지도 못할 질문을 해본다. '아, 입사 면접을 봤구나.'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갈 때가 되어서야, 나는 그들의 대화 소재가 AI 입사 면접 후기였음을 깨달았다.
십여 년 전에는 AI 입사 면접의 도입 여부 자체가 화두인 시절이 있었다. '기계가 사람을 판단하는 게 말이 되느냐'라는 주장부터, 결과의 신뢰성까지 왈가왈부 논쟁이 치열했더랬다. 지금은 누구나 너무나 당연하게 AI로 면접을 준비하고, AI로 합격 여부를 판단하는 시대가 됐다. 디지털 전환시대를 맞이하여, 이제 AI는 없어서는 안 될 창이자 방패가 된 셈이다. 기업들은 자체 AI 기반 플랫폼으로 지원자들의 자기소개서를 분석하고, 메타버스 전형으로 가상 업무 상황에서의 대응 능력을 평가한다. AI 면접은 지원자의 답변이 믿을만한지, 감정 조절 능력이 출중한 사람인지를 빠르게 판별해낸다. AI와의 화상 면접에 대비해 모의 녹화 면접을 준비하는 AI 면접 코칭은 필수 코스가 된지 오래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AI에게 점수 잘 맞는 비결이 꿀팁 중의 꿀팁이 되었다.
그런데 AI가 더 바빠졌다. 근래 미국에서는 사람이 아닌 AI가 해고를 결정했다고 한다. 어떤 기업도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으나, 여러 정황상 그럴 것이라는 의혹이 여럿 제기됐다. 일례로 아마존은 2019년에 생산성을 측정하는 자동화 프로그램을 활용해 물류 센터 직원을 해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2023년 구글은 1만 2천 명을 감원하면서 알고리즘으로 해고 대상자를 선정했다는 합리적 의심을 받고 있다. 메타도 마찬가지다. 통상 이런 과정에서는 직원들의 인트라넷 이용 기록, 메일, 채팅 내용 등 그야말로 빅데이터가 동원된다. 보안 업무 등의 사유로 CCTV가 많은 사무실이라면, 조심하시라.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결코 안전하지 않을지 모른다.
20년 넘게 AI를 연구 중인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는 앞으로 인간이 AI에게 잘 보여야 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농담반 진담반이라고 하는데, 나는 왠지 그의 말이 진담으로 들린다. 그러면서 그는 AI에게 무언가를 물어보거나, 요청할 때 본인은 꼭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나중에 AI가 인간의 생사를 결정할 때, '평소에 반말했던 그 인간이잖아?', '이 인간 SNS 좀 봐봐. AI 비관론자네. 우리 욕이 가득해.'라고 하며 불리한 처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였다. 난생처음으로 AI를 사용할 때 나는 더없이 조심스러웠다. 척척 박사 같은 AI에게 기능적으로는 사실 별 필요도 없는 '고마워'를 얼마나 남발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요즘 AI에게 은근슬쩍 반말 중이다. 변명을 하자면, 자주 쓰다 보니 편안한 친구처럼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나 혼자만의 일방적 친구 사이이겠지만 말이다.
오래전부터 나는 사람들의 이마에 바코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마트에서 바코드를 인식하면 가격이 나오는 것처럼, 서로 잘 맞는 사람을 단번에 식별할 수 있다면 수많은 소모적 인간관계가 사라지지 않을까. 가끔 나의 이런 황당무계한 상상에 동감하며, 바코드 찾으면 알려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있을 리가 없다'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찾게 될 것 같다. 바로 AI이다. 지금의 속도와 방향으로 AI가 발달한다면, 우리는 고민이 되는 모든 순간에 AI에게 판별을 부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AI는 그 사람의 DNA, 학력, 직장, 성격유형, SNS에 작성한 글, 관심사 등 모든 데이터를 망라해 나와의 적합도를 1이 아니면 0으로 결정해버릴 것이다. 이 얼마나 속 편한 일인가. 드디어 '인간 판별기'를 찾았구나. '심봤다'를 외치려는 순간, 나는 그만 머릿속이 하얘졌다. 잠깐, 중요한 걸 잊은 것 같다. 기계와 달리 사람은 찰나에도 새롭게 태어날 수 있고, 시시각각 변하는 존재라는 것을. 아쉽게도 아직 나는 '인간 판별기'에게 나를 맡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