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1호

[백일 백장] 100-89

종로는 관광지, 전통시장이 즐비한 명실상부한 서울의 대표적인 구도심이다. 종로 일대를 거닐다 보면, 외국인 관광객과 어르신을 정말 많이 마주치게 된다. 가끔 그분들이 꼭 나를 위한 선물같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어느 나라에서 관광을 많이 오는지, 표정은 어떤지, 시장에 앉아서 무엇을 많이 먹는지 등. 산책을 하며 그들의 이모저모를 관찰하는 건 나의 소소한 기쁨 중 하나가 됐다. 반면에 어르신은 그냥 하나의 덩어리처럼 느껴진다. 그 수가 워낙 많기도 하고, 사실 별다른 특징을 찾아보기 어려워서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오늘 아침, 나는 드디어 기억에 남는 '어르신 1호'를 발견했다. 지하철 출구 쪽 계단을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누가 보더라도 가발을 쓴 듯 어색한 남자의 뒤통수가 나타났다. 게다가 그는 정장 바지에 와인색 재킷을 입고 있었다. 종로 거리에 오 분만 서 있어 보면, 그의 옷차림이 결코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찬찬히 좀 더 함께 걸어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우리는 서로 가는 길이 달랐다. '어르신 오늘은 여기서 이별이네요, 건강하세요'라고 혼자만의 고별인사를 해본다.
길을 걷는데, '어르신 1호'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왜 그랬을까. 어색한 가발 때문인가. 옷차림이 특이해서 그런가.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아마도 '어르신 1호'가 아직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신호를 보내서 그런 것 같다. 탈모인들은 안다. 나이가 들어 가발을 쓰는 것이 얼마나 큰 결심인지. 가발도 쓰고,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옷도 입어보고. '어르신 1호'는 나이는 많지만 여전히 인생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나이가 들었을 때, 나도 그처럼 용기 있게 살아갈 수 있으려나. 어떤 사람은 어울리지도 않는 가발을 쓰고, 눈에 띄는 옷을 입은 그를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조금 그랬다. 그런데 그의 뒷모습이 종일 내 마음 한편에 머물다 갔다. 나는 나이가 들어도 좀 더 멋져 보이고 싶은 그의 마음이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그가 부디 스스로에게 매력적인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금년 말에 은퇴 예정인 동료와 밥을 먹었다. 누군가 은퇴하면 뭘 하고 지내고 싶은지 물었다. 그러자 흡사 로또라도 당첨된 사람들처럼 모두들 신이 났다. "악기를 배우고 싶다. 미용을 배워서, 봉사활동을 다니고 싶다. 성우 트레이닝을 받아서, 구연동화 강사로 활동하고 싶다. 실버 모델에 도전하고 싶다." 은퇴가 은퇴가 아닌 것처럼 계획이 창대했다. 계획을 말하자 속마음이 따라왔다. "집에서 그냥 쉬면 정말 금방 늙어버릴 것 같아서, 두렵다. 60대에 할머니, 할아버지 취급을 받는 건 억울하다. 기왕이면 노인보다는 실버라고 불러주면 좋겠다." 가까운 미래에 국민의 절반이 노인인 시대가 올 것이다. 어르신 2호, 3호를 기대해 본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