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중학교 때 한 번 읽었고,
20대 때도 읽은 기억이 있다.
중학교 시절, 문학소녀였던 나는
스트릭랜드(고갱이 모델)의 인간적 흠결에도
신경 쓰지 않고 그의 예술혼을 흠모했다.
지금까지도 고흐의 그림보다
고갱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소설 때문이겠다.
6펜스가 아닌
달을 따라 사는 삶을 살아야지 생각했다.
현실보다 이상을 더 아름답게 여겼던 소녀는
20대가 되어 현실의 무게를 깨닫게 되었다.
그럼에도 서른이 되기 전까지
예술을 사랑했던 것도 같다.
11월 독서모임에서 이 책으로 모임을 한단 말을 듣고
서재에서 이 책을 꺼냈더니
책에 메모해 놓은 내용이 있었다.
“2009년 4월 18일,
연극 <달과 6펜스>를 보러 가기 전날”
이 책을 구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2025년의 나는
연극을 보았던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아서
블로그를 찾아보아야 했다.
연극 후기에는
연극이 좀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었다고 쓰여 있었다.
삼십 대 초반이었던 당시에도
예술혼이 빛나는 스트릭랜드에 대한 호감이
있었나 보다.
그러나 40대 후반이 된 지금,
달의 꿈만큼 6펜스의 무게도 실감하며 산다.
예술혼을 위해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고갱보다
동생 테오에게 빚은 졌지만
조용히 미쳐갔던 고흐가 좋아지기도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예술은 현실과 멀어진 시대다.
물건을 구매할 때
가격을 따지지 않는 사람들이
클래식을 듣고,
N번째 관람이 가능한 전문직들이
뮤지컬을 본다.
한때는 미술관으로 그림을 보러 다녔던 나도
이제 주위 사람들과 그림 이야기를 할 일이 없다.
넷플릭스처럼 언제든 켜면 볼 수 있는
OTT 플랫폼이 가깝고,
그보다 스마트폰만 열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유튜브가 익숙하다.
문학을 읽는 일조차
소수의 사람들이 향유하는 취미가 된 지금,
달은 여전히 빛날 수 있을까.
6펜스의 가치를 모르는 예술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제 대답할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