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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리머소녀 Sep 27. 2020

코로나 시대에 미국에 산다는 것은

자가격리 명령 해제로 허락된 자유

코로나로 인한 자가격리 명령(Stay-at-home Order)이 해제되고 메릴랜드주 회복 1단계가 시작되기까지는 약 한 달 반이 걸렸다. 주(State) 정부에서는 1단계를 발표했어도 우리가 속한 카운티(county)는 좀 더 보수적으로 접근하면서 조심스럽게 오픈을 시작했다. 1단계 시작과 함께 가장 먼저 열린 공간은 공원 시설과 놀이터였다. 범죄현장에 사용하는 노란색 테이프로 칭칭 감아놓은 놀이터를 보며 서럽게 울던 둘째 아이가 너무 딱했는데, 드디어 원 없이 놀 수 있게 된 거였다. 두 달만에 아이들과 함께 미끄럼틀과 그네를 타면서 마치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사람처럼 감격했다.


동네 식당들도 하나둘씩 문을 열기 시작해 테라스에 띄엄띄엄 앉아 외식을 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상점 앞에 6피트씩 떨어져 줄 서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이후 피켓을 들고 마스크를 쓴 채 조용히 인종차별 반대 시위를 하는 사람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 곳곳의 시위와 폭동 현장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는데, 이 동네의 시위는 다행히 평화롭고 질서 정연했다. 우리 네 식구는 두 달만에 다 같이 마트에 가고 초밥도 픽업해와 먹으며 오랜만에 식사 준비를 거르는 호사를 누렸다.


당연하게 여기며 누려왔던 것들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되찾는 시간 (Photo by dreamersonya)


남편의 회사에서도 현장근무를 권고한다는 이메일이 왔고, 남편의 셔츠를 오랜만에 다리며 또다시 감상에 젖었다. 반년이 넘는 기간 동안 거의 매일같이 붙어있던 남편이 이제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에나 온다고 생각하니 섭섭하기도 하고, 낯선 곳에서 아들 둘을 하루 종일 혼자 감당할 생각에 좀 두렵기도 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폐쇄된 공간에서 업무를 해야 하는 남편의 안전과 건강도 걱정이 되었다. 출근하는 남편 뒤통수에다 대고 엘리베이터 타지 말고 계단으로 다니라고, 사람들 있는데서 마스크 절대 벗지 말라고 잔소리를 했다. 어련히 알아서 조심하겠지만, 뉴욕에서 출근길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다가 코로나에 걸린 한국인의 투병 후기를 읽고는 폐쇄된 공간이 제일 무서워졌기 때문이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아이들 아침식사를 챙기고 학교 과제를 도와주고는 먹이고 치우고 쫓아다니다가 또 먹이고 치우는 일상이 이어졌다. 하루는 무지막지하게 긴데, 이상하게도 먹고 치우고 돌아서면 또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편 우리가 살고 있는 카운티의 학교들은 메릴랜드주 회복 단계와 상관없이 학기말까지 휴교를 연장했고, 가을학기 개학 방식(온라인/오프라인/하이브리드)은 여름방학 중에 논의해서 통보하겠다는 이메일이 왔다. 하루 종일 내 시간 없이 아이들과 한 몸이 되어 지내며 학교 공부까지 일일이 챙겨야 하는 일상이 결코 쉽지 않았기에 발표하던 날은 맥이 쫙 빠졌다. 2주 휴교 후 또다시 한 달 연장할 때부터 이미 이렇게 될 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나마 큰아이가 시카고에서 몇 달 간이라도 학교를 다녀보지 않았더라면 미국 학교는 이런 곳이라는 컨셉조차 없이 고국을 떠나온 상태 그대로 멈춰있을 뻔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 비상사태로 미 이민국 업무도 중단되었고, 특히 가족 초청 카테고리의 이민은 언제쯤이나 재개될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미준모(네이버 미국 이민 카페)에는 주재원이나 교수로 미국에 파견 왔다가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들, 미국 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았는데 온라인 개강을 하게 되어 그나마 안전한 한국에서 수업을 들을 거라는 사람들, 이민 비자를 받았지만 미국 상황이 이러니 포기하기 직전이라는 사람들의 글이 줄줄이 올라왔다. 중고등학생 자녀 혼자 미국에 유학을 보내 놓은 경우에도 부모의 근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던 세상에 이런 일이 닥치리라고 누가 예상을 했겠는가.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폐쇄되기 전 태평양을 건너오고, 영주권, 소셜 넘버와 운전면허 3종 선물세트를 취득하고, 미국 학교도 경험해보고, 길고 힘겨웠던 구직 과정과 국내 이사를 거쳐 여기까지 온 우리...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걸어온 길은 경이로웠다.




자가격리 명령이 해제되자 동네 아이들이 봇물 터지듯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큰아이는 학교 과제가 끝나고 점심을 먹고 나면 옆집 아이들의 띵동- 소리와 함께 총알 같이 밖으로 튀어나가 오후 내내 거의 밖에서 살다시피 했다. 메릴랜드 주는 5월 중순부터 더워져 세차 호스를 꺼내 물놀이도 하고, 물총 싸움도 하고, 물풍선도 터뜨리면서 아이들은 매일같이 신나게 놀았다. 어린 둘째를 큰아이하고만 내보낼 수 없어 나도 같이 나가서 아이들과 보조를 맞추어 걷다가 뛰다가 자전거도 탔다. 밤에 누우면 종아리가 쑤셔오고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기절할 만큼 갑자기 운동량이 많아졌던 때였다. 이해할 수 없는 바이러스 때문에 학교도 못 가고, 친구들도 못 만나고, 모든 활동을 중단해야 했던 아이들은 삽시간에 서로의 '세상'이 되었다. 동네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고, 어른들도 밖으로 나와 그간의 안부를 묻기도 하면서 이제야 이곳이 조금 사람 사는 곳 같이 느껴졌다.


어느 날은 왼쪽 옆집 아줌마가 아이스크림을 쏘겠다고 해서 가족들이 함께 마실을 다녀오기도 했다. 저녁에는 오른쪽 옆집 이웃들까지 나와 우리 집 드라이브웨이에서 맥주와 음료를 한 캔씩 들고 밤 10시까지 수다를 떨었다. 모인 사람들 모두가 한국 사람이거나, 한국 사람과 결혼했거나, 한국에서 군 복무한 경험이 있거나, 한국전쟁(6.25)에 참전했던 직계가족을 두고 있다는 게 참 놀라웠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미국 동부의 작은 마을에 이렇게나 한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많다니... 두 나라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느껴져 어쩐지 가슴이 뭉클했다.


상큼 발랄한 오른쪽 옆집 아줌마는 코로나가 조금 잠잠해지거든 우리 블럭에 사는 사람들이 각자 음식을 한두 가지씩 준비해서 파트락 파티(Potluck Party, 여러 사람들이 각자 음식을 조금씩 가져와서 나눠먹는 파티)를 하자고 했다. 자기네 집 외벽 코너 쪽에다가 음식을 세팅하고 맥주도 마시면서 신나게 수다 떨고 밤늦게까지 놀자면서, 나 보고는 불고기랑 비빔밥, 총각김치를 부탁한다고 했다. 동네 이웃들과 음식을 나눠 먹으며 파티를 한다니, 상상만 해도 흐뭇해 눈가가 촉촉해졌다.


자가격리 명령만 해제되어도 사람이 이렇게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구나 생각했다. 답답하고 힘든 것만 생각하면 끝도 없지만, 많은 시간을 가족과 붙어 지내고, 집에서 만든 음식을 함께 먹고, 각종 모임으로 바삐 돌아다니는 대신 집과 동네와 자연 속에서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는 것도 참 감사한 일이었다. 언젠가 코로나가 종식되고 나면 온 가족이 꼼짝 않고 24시간 붙어 지내던 그 시간이 아련한 추억으로 자리 잡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온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 같지만, 주어진 상황 가운데 우리가 속한 이 곳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순간을 충만하게 살아내고 싶었다. 건강하게, 감사하게, 평안하게, 최대한 노멀하게 살아내려고 몸부림을 쳤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가 선물임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드문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존재할 뿐.
To live is the rarest thing in the world.
Most people just exist.

- 오스카 와일드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소중한 일상의 순간들 (Photo by dreamerson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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