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번째 결혼기념일에 부쳐
오늘은 남편과 나의 11번째 결혼기념일이다. 16년 전 우리는 대학원 동기로 만났다. 경상북도 포항의 아담한 학교에서 하루 24시간의 절반 이상을 열공하던 시절, 유독 부담스러운 눈빛을 끊임없이 날리던 한 남자가 있었다. 가죽재킷에 청바지를 대충 걸치고 짧게 쳐올린 스포츠머리에는 젤을 발라 바짝 세우고 왼쪽 귀에서는 큐빅이 반짝이는, 누가 봐도 양아치 같은 첫인상이었다. 해외 곳곳에 돌아다니며 살았다고 하는데 미국 교포식 영어는 아니고 살짝 유럽풍이 나는 영어를 쓰는 것 같았다.
지독하게 목표지향형인 데다 일중독이었던 나는 대학원 공부 외에도 학회 활동, 학술지 편집, 각종 회의와 행사 통역, 외국학생들의 한국어 교사에 합창단까지 문어발식으로 발을 담가놓고 1분 1초를 아끼며 전투적으로 살았다. 한시라도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줄 알았던 시절이었다. 내가 꿈꾸고 계획하던 인생에 결혼이나 출산, 육아 같은 것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폼나는 커리어 우먼이 되어 돈과 명예를 거머쥐고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골드미스로 사는 30대를 꿈꿨다. 성취감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다.
그러니 난데없이 나타난 이 나무꾼의 도끼질은 부담스럽기만 했다. 강렬한 눈빛 화살을 피해 대학원 도서관 내 지정석에서 짐을 싸들고 학부 도서관으로 원정을 다니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의 친구들이 슬그머니 다리를 놓으려는 낌새 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내 절친들까지 그의 온유한 성품과 한결같은 성실함에 점수를 주기 시작했다. 양아치 같았던 그가 새벽기도에 나와 울부짖으며 (아마도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소식도 들리고, 그렇게 기회 한 번을 주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 않느냐는 진심 어린 충고도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결국은 매일같이 도끼를 들고 내 앞에 나타나는 이 성실한 나무꾼에게 기회를 줘보기로 했다.
대학원 동기로 만난 지 2년 남짓만에 사귀기 시작하면서도 나에겐 계속 믿음이 없었다. 조금만 실망스러운 말이나 행동을 보여도 우린 인연이 없는 것 같다며 이제 그만 헤어지자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었다. 그렇게 모진 나를 그는 언제나 따뜻하고 자상하게 보듬어주었다. 당시 대학원에서 셔틀버스로 15분 거리에 있는 투룸에서 친구와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그는 매일 밤 셔틀버스로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기다렸다가 다음 버스를 타고 학교 기숙사로 돌아갔다. 셔틀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만 다니던 그곳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나를 데려다주고 다음 차로 학교로 돌아가던 그 한결같은 섬김에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 공부할 양이 어마어마했던 대학원 시절의 한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그는 가족이 있는 하남으로, 나는 인천 송도 근처로 이사를 했다. 그는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나는 시험 준비를 하고 있던 때라 일주일에 한 번씩만 만나자고 선포했다. 어머니의 낡은 빨간색 라노스 줄리엣을 빌려 타고 그는 하남에서 송도를 매주 오갔다. 길이 막히면 왕복 서너 시간도 걸렸을 거리를 매주 와서 맛있는 걸 사주며 힘내라고 격려해주던 그가 참 고마웠다. 함께 보낼 주말이 기다려지고 그가 돌아갈 시간이면 내 눈에 아쉬움이 고였다. 이런 남자라면 평생을 함께 해도 괜찮지 않을까,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혼자여도 행복할 순 있겠지만 함께라면 더 충만하게 행복할 것 같았다. 내 마음을 바꾼 건 그의 한결같은 성실함이었다.
내 마음이 동하고 있는 걸 알았을까, 그는 취직한 지 8개월 만에 나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결혼할 날짜 다 받아놓고 형식적으로 하는 이벤트 말고, 반지만 준비한 상태로 정식으로 결혼 의사를 묻는 프러포즈 말이다. 장인어른되실 내 아버지께 나 몰래 전화를 걸어 딸에게 청혼해도 되겠냐고 허락을 받고는 그날 저녁, 무료 시식 이벤트에 당첨되었다며 근사한 레스토랑에 나를 데리고 갔다. 실제로 그는 늘 무언가에 당첨되는 살림꾼인지라, 나는 어떤 상황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코스 요리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싹싹 비웠다. 식사를 마친 후, 그는 아이팟으로 우리가 지나온 시간들을 잔잔한 음악과 함께 슬라이드 쇼로 보여주고는 드디어 사태를 파악하고 눈물 흘리고 있던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물었다.
Will you marry me?
2010년 1월 눈발이 흩날리던 겨울날, 사귄 지 3년, 약혼한 지 1년 만에 우린 백년가약을 맺었다. 시카고 아주버님네 가족과 캐나다 동생네 가족이 결혼식에 참석하려면 성탄절과 연말연시를 끼는 게 좋겠다는 판단에 1년 중 제일 추운 연초를 골랐다. 결혼식 때 너무 피곤하고 긴장해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많던데 나는 제대로 맨 정신이었다. 그 날 있었던 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한다. 일찍 와서 신부대기실에서 같이 사진을 찍은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 아버지 손을 잡고 입장하려고 서 있는데 날 보며 눈물을 찔끔하던 친구들, 목사님의 주례사와 성경구절, 축복송으로 축가를 불러준 친구들, 웨딩카를 장식해준 친구들, 신혼여행 떠나기 전날 저녁 호텔로 선물을 들고 찾아온 친구들, 폐백 때 처음 인사드린 시댁 친척들 얼굴까지 생생하게 떠오른다. 결혼식을 올린 후 이젠 내 남편이 된 나무꾼이랑 신혼여행 짐을 챙겨 떠나면서 “우와! 우리 이제 부부야!!!” 소리치던 장면도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우리가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가 되었고, 천하보다 귀한 두 아들의 부모가 되었으며, 세상 빡센 직장에서 맞벌이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두 달 동안 지구 한 바퀴를 돌았고, 틈틈이 수많은 곳들을 여행했으며,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했고, 집을 한 번 샀다가 팔았고, 한 번의 해외 이사와 다섯 번의 국내 이사를 했으며, 미국에 이민 와서는 한동안 잡리스/홈리스로 지내기도 했다. 둘 다 공부만 오래 하다 보니 각자의 부모님과 정서적 탯줄이 끊기지 않은 상태로 결혼했음을 뒤늦게 깨닫기도 했다. 큰아이 낳고 직장 다니면서는 몸과 마음이 한없이 피폐해져 이러다 끝장나겠다 싶을 때까지 싸우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건, 2010년 오늘보다 2021년 오늘의 나무꾼이 더 듬직하고 멋져 보인다는 사실이다. 한결같은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따뜻하고 배려 깊은 섬김으로 나를 사랑해준 그가 고맙고 사랑스럽다.
철없던 우리가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고, 40대에 진입하고, 미국으로 터전을 옮기며, 넘어졌다가도 진흙탕에서 뒹굴다가도 서로 잡아주고 끌어주며 다시 털고 일어나 하루하루를 묵묵히 살아간다. 앞으로도 그저 지금처럼만 살아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있을까.